▲ 대기업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영등포 지하상가.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서울의 강남, 동대문, 영등포….
수년 전만 해도 지하상가는 그나마 임대료가 저렴해 영세 상인들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곳마저도 대기업의 진출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유동인구가 많아 장사가 잘 되는 점포의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영세 상인들은 꿈도 못 꾸는 실정이다. 최근 지하상가마다 리모델링 열풍이 불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보다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고자 진행한 공사였지만 영세 상인들은 길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돼버린 셈이다.
이들이 쫓겨난 자리에는 슬그머니 대기업의 간판을 단 점포들이 입점했다. ‘GS25’ ‘세븐일레븐’과 같은 편의점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더니 이제는 ‘던킨도너츠’ ‘더페이스샵’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지하상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임대료보다 비싼 값을 부르면 상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들의 내습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서울 강남지하상가 인근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그나마 여기는 어느 정도 상인들의 입지가 탄탄해 내쫓기는 일은 드물다. 그래도 대기업들이 돈뭉치를 들고 찾아오니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며 “다른 지하상가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상가가 밀집한 지역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김없이 대기업이나 대형 프랜차이즈업체의 손길이 닿은 것을 볼 수 있다. 커피나 머핀을 파는 카페에서부터 아이스크림, 화장품, 의류 브랜드까지 업종도 다양하다. 일부 지하상가에는 지상 바로 아래 같은 매장이 들어선 곳도 있을 정도다.
정부의 지원으로 지하상가에 가판대나 간이매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저소득층들도 대기업의 등장에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다. 매장 운영권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편의점과 대기업이 운영하는 점포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손님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동대문역 지하상가 상인들에게 음료를 팔며 생계를 유지해오던 김 아무개 씨(62)도 요즘 걱정이 많다. 김 씨는 “20년이 넘게 허리가 아파도 리어카를 끌며 300원, 500원짜리 커피나 차를 팔아 겨우 먹고살았는데 요즘은 장사가 안 된다”면서 “편의점이 하나씩 생길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카페니 빵집이니 전문점이 들어오니 하루에 10잔도 못 파는 날이 많다”며 울먹였다.
대부분의 지하상가 상인들은 “지난해 7월부터 지하도상가 운영사업자(임차상인) 선정 방식이 수의계약에서 일반 경쟁입찰제로 바뀌었다. 공정한 임대절차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임대료를 상승시켜 영세 상인들을 내쫓는 결과만 낳았다”며 하소연했다.
이런 현상은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등 지방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하상가 전체를 대기업이 소유하면서 계열사 점포를 내기 위해 기존의 점포를 일방적으로 철수시키는 등 여기저기서 마찰을 빚고 있는 것. 하지만 법적으로 이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서울시 관계자는 “일부 지하상가는 민자투자사업으로 운영되고 있어 직접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정당한 절차에 의해 지하상가 임대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며 “우선 사업권 배정 등 영세 상인들을 위한 보호도 이뤄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