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들어 북한 당국이 무척이나 분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4월 11일에는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권력구도 개편을 알리는 ‘4차 당대표자회의’를 치렀고, 4월 13일에는 장거리 미사일 ‘광명성 3호’를 쏘아 올렸다. 북한의 이 같은 행보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최근 국내 대표 민간대북연구단체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NKSIS)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직접 남겼다는 ‘유서’ 일부를 공개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김 위원장의 사망 직후 국내외에서는 유서 혹은 유훈의 존재여부를 두고 갖가지 추론이 나돈 바 있다. 지난 2월경 북한 내부에서 입수했다는 이 ‘유서’ 안에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북한의 향후 통치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과연 김 위원장은 생전에 어떤 유언을 남겼을까. 김정일 유서공개 현장을 직접 방문해 유서 내용 및 대북 전문가들의 분석을 들어봤다.
지난 4월 12일 서울 잠원동 리버사이드 호텔에서는 김 위원장이 직접 남겼다는 ‘유서’의 내용이 일부 공개됐다. 문제의 ‘유서’를 입수해 공개한 NKSIS 이윤걸 대표는 “유서는 지난 2011년 10월 17일 김 국방위원장이 여동생 김경희에게 직접 남긴 내용이다. 우리는 지난 2월경 이를 입수했으며 수차례 ‘크로스 체킹’을 통해 진위를 확인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8일, 한 차례 쇼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후 죽음을 감지해 유서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NKSIS)는 12일 세미나를 열고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 동생인 김경희에게 남겼다는 유서를 공개했다. 유장훈 기자 |
김 위원장이 생전에 ‘유언 집행자’로 지목한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의 여동생 김경희였다. 정영태 연구위원은 “유언장을 누가 집행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김경희였다. 세간에서는 장성택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는 결국 잘나가는 와이프의 남편에 불과하다. 김정은을 지원하고 보장해주는 인물은 결국 김경희다”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가 현장에서 발표한 ‘유서’의 일부내용은 총 28개 항목이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이다.
우선 대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하며 유서를 읽는 순간부터 1년 내에 최고직책에 올릴 것 △당에서는 김경희 장성택 최룡해 김경옥, 군에서는 김정각 리영호 김격식 김명국 현철해, 경제에서는 최영림 김창룡 서원출 김영호가 보좌할 것 △모든 자식과 식구들을 끝까지 돌보고 김정남을 배려할 것 △삼천리금고와 216호 자금(국내외 자금줄)을 김정은에게 이관하고 금고 안 서류를 김정은에게 넘길 것. 직접적인 자금관리는 김경희가 할 것 △김설송을 김정은의 방조자로 하고 김경희 유사시 자금관리 역시 김설송이 할 것 △종파를 주의하고 선군사상을 끝까지 가져갈 것. 이를 위해 보위사령부와 보위부를 높여줄 것 △전력수급을 위해 원자력발전소 3개 이상을 건설할 것 등이다.
유서의 대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북한 정권의 기본적 행태와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년 내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과 ‘자금줄의 이동’, ‘보위기관을 통한 종파 척결과 내부단속 강화’, ‘선군사상 지속’ 등은 김 위원장이 생전에 줄곧 주장했던 부분이다. 배척관계에 있는 장남 김정남을 배려하라는 유언 정도가 다소 특이한 점이었다.
현장에 참석한 패널들은 김 위원장이 유서를 통해 직접 지목한 인물들에 초점을 맞췄다. 패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인물은 바로 김 위원장의 딸 김설송과 최룡해 당 비서다. 김 위원장이 김정은의 방조자로 김설송을 지목한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김설송은 김 위원장의 둘째 부인인 김영숙의 딸로 알려졌으며 김정은의 열 살 터울 이복누나다. 대북전문가들은 그동안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방조자 역할을 할 것으로 점쳐왔다.
정영태 연구위원은 “김경희가 문제됐을 때 김정은을 도울 수 있는 인물이 김설송이라는 것이다. 김설송이 핵심이다”라고 지적했고, 정성장 연구위원은 “김여정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김설송을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김진무 연구위원 역시 “결국 김경희와 김설송이 지목됐다는 것은 통치의 중심을 친인척으로 두겠다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최룡해 당 비서는 유서에서 김정은의 친위세력으로 김경희와 장성택 다음으로 언급됐다. 최 비서는 최근 당대표자회의에서 ‘총정치국장’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오르며 단박에 2인자로 등극했다. 유서 내용이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핵심 당 인사가 군 핵심조직으로 꼽히는 총정치국장에 올랐다는 것은 결국 당이 군을 통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최 비서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전우 최현의 아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김진무 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결국 최룡해의 부각은 통치의 중심은 친인척으로 두되, 기존 빨치산 세력이 이를 보좌하게 하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유서에 담긴 대외적 내용으로는 △선군사상을 끝까지 가져가 대국(중국 추정)의 노예가 될 것을 조심히 할 것 △조국 통일을 가문의 목표로 할 것 △핵, 장거리 미사일,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할 것 △미국과 심리적 대결에서 반드시 이기고 6자회담을 잘 이용할 것 △중국을 경계하고 이용당하지 말 것 등이다.
역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대미·대중관계다.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직접 6자회담을 언급했다는 것은 결국 6자회담을 통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또한 유서에 언급된 중국에 대한 경계 역시 주목을 끌고 있다. 김 위원장은 갈수록 내부에서 입김이 세지고 있는 중국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김 위원장은 유서에서 “중국은 역사상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한 나라”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정부 당국은 이번에 공개된 ‘유서’의 진위 여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국내 유력 전문가들이 직접 현장에 참여해 신빙성을 더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에 일부 공개된 유서 내용은 다소 기본에 충실한 내용이었다.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내용 중에는 김 위원장의 보다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내용이 담겼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김 위원장의 비공개 유서 내용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