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통합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박지원 의원. 이종현 기자 |
지난 4일 낮 민주통합당(민주당)의 19대 국회 제1기 원내대표 경선이 치러진 국회 본청 246호 회의실. 문희상 선거관리위원장이 1차 투표 결과를 발표하자 장내가 술렁였다. 1차 투표에서 무난하게 당선되거나 타 후보를 압도할 것으로 예상됐던 박지원 후보의 득표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친노(친노무현)그룹과 박지원계 간의 이른바 ‘이해찬 당대표 - 박지원 원내대표 역할분담 합의’를 거쳐 출마한 박지원 후보 측은 경선 전 “80표 정도를 확보했다”며 1차 투표 낙승을 자신했었다. 박 후보 측에선 총선 당선자 66명의 실명이 담긴 명단이 흘러나오기도 했었다.
30여 분에 걸친 2차 투표 끝에 박 후보는 67표를 얻어 60표에 얻은 유인태 후보에 신승했다. 가까스로 기사회생하긴 했지만 민주당 내 최대주주인 친노와 호남의 ‘주류 연합’으로선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뒤였다.
실제로 이날 원내대표 경선 결과는 박지원 신임 원내대표에겐 ‘상처뿐인 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차 투표에서 ‘주류 연합’에 맞선 ‘비주류 연합’ 후보 3인의 득표수는 총 77표. 박 대표가 얻은 표보다 28표나 많았다. 비록 이들 비주류 3인 간의 ‘결선 투표 시 연대’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지만, 1차 투표 결과엔 ‘이해찬-박지원 연대’에 대한 당내의 부정적 평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치 9단’으로 불리는 두 사람 간의 연대가 어떤 그럴 듯한 논리로도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임을 민주당 총선 당선자들이 표로써 보여준 셈이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명분 없는 연대에 나섰던 친노와 호남이 공히 져야 하겠지만, 결국 박 대표의 향후 정치적 입지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숫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류 연합’과 ‘비주류 연합’의 갈등과 대결은 오는 6월 9일로 예정된 당대표 경선으로까지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분패한 ‘비주류 연합’ 측이 더 강한 연대로 설욕전을 벌일 태세다.
특히 손학규·정동영·정세균 상임고문 등 비노그룹 대선주자들이 분위기가 심상찮다. 손학규 고문은 2일 유럽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귀국 일성으로 ‘이-박 연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손 고문은 “국민은 ‘구태정치’를 보고자 하지 않는다. 국민은 정치인 자신들만을 위한 ‘정치놀음’에 진력이 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민주당이 집권하든 않든 관심이 없다. 국민의 관심은 어려운 삶을 풀어줄 수 있는 정치, 민생을 챙겨줄 수 있는 정치에 있다. 정치가 공학정치에 매몰돼 있을 때 국민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만족스런 유럽 정책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그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굳은 표정이었고 목소리도 톤이 높았다. 말을 아끼고 있을 뿐 이 같은 기류는 정동영·정세균 고문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 비노 대선주자들이 6·9 전대에서 ‘주류 연합’ 후보로 나설 이해찬 상임고문을 견제하기 위해 손을 잡을 경우 전대 구도는 주류 대 비주류의 단순 구도로 재편될 수 있다. ‘주류 연합’ 측이 ‘이-박 연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친노와 비노, 호남과 비호남의 대결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친노 대 비노, 호남 대 비호남의 갈등구도가 ‘이-박 연대’ 논란을 거치면서 주류 대 비주류의 갈등구도로 대체됐을 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계파 간 갈등은 이전보다 더 심각해지고 노골화됐다는 게 당내 인사들의 주된 평가다.
박지원 대표가 이처럼 ‘상처뿐인 영광’만 안게 된 것은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이-박 연대’에서 너무 구시대의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다. ‘이-박 연대’ 사실이 전해졌을 때 전병헌 후보는 “거물들이 정했으니 의원들은 군소리 말고 따라오라는 얘기냐”고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이-박 연대’가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의 자존심을 긁은 것이다. 초선 당선자 21명이 공개적으로 비판 성명을 발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특히 이해찬 상임고문과 박지원 대표는 “구시대적인 담합을 위해 당내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까지 팔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상임고문이 박 대표의 출마를 종용했다는 사실이 ‘이-박 연대’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김한길 당선자는 “대선주자를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이럴 수 있느냐”며 혀를 찼다.
여기에 이 고문과 박 대표 간에 비상식적인 합의가 이뤄졌다는 의혹이 더해지면서 당내 여론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두 사람이 당초 원내대표 합의추대를 추진했다는 의혹과 이 고문 측이 박 대표 측에 지지의원 명단을 넘겨줬다는 의혹이 바로 그것이다. 시민사회 출신의 한 초선 당선자는 “당초 이 고문과 박 대표가 다른 원내대표 후보들을 모두 주저앉히고 박 대표를 합의추대하려 했는데 타 후보들이 응하지 않는 바람에 좌절됐다”고 주장했다. 이 당선자는 “이 고문의 주변 인사들이 ‘박지원 원내대표’ 합의추대를 위한 서명작업을 하려다 이것이 당헌·당규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만뒀다”고도 말했다.
또 다른 당선자는 “이 고문 측이 박 대표 측에 ‘지지의원 55명’ 명단을 주기로 약속했었다”면서 “지난 4월 26일 박 대표가 원내대표 출마 기자회견을 오전 11시에 하려다가 오후 2시, 오후 3시, 오후 5시 순으로 계속 연기한 이유는 이 ‘지지의원 명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당선자는 “결국 박 대표 측에 지지의원 47명의 명단이 전해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해 이 고문 측과 박 대표 측 모두 “완벽한 소설”이라고 부인했지만, 이미 ‘막후 합의’로 인해 두 사람의 신뢰가 흔들린 상황이었다. 비주류 측 인사들은 이 같은 의혹을 전해 듣고 경악했다.
원내대표 당선까지 계속 이어진 우여곡절은 결국 두고두고 박 대표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패한 비주류 측이 사사건건 박 대표에 맞설 가능성이 높다. 한 비주류 측 중진 의원은 “이해찬 고문을 당대표로 만들기로 약속하고 원내대표가 된 사람이 어떻게 전당대회를 공정하게 관리할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이번 원내대표 당선이 “대선 승리를 위해 ‘판 메이커’, ‘킹메이커’가 되겠다”던 박 대표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향후 정치적 입지에 걸림돌이 될 ‘불편한 혹’들 역시 적잖게 떠안게 된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