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전자산업의 원조 메카 ‘세운상가’에 공대 졸업반 학생들의 발길이 잦다. 이곳에서 졸업작품을 쇼핑하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준다. 사진은 세운상가 전경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지난 5월 2일 기자는 국내 전자산업의 원조 메카로 통하는 ‘세운전자상가’를 직접 찾았다. 세운상가는 예전부터 졸업을 앞둔 공대생들이 졸업작품을 살 수 있는 암시장으로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공대에서는 ‘졸업논문’ 대신 학부에서 배운 기술적 이론을 토대로 한 전자제품을 ‘졸업작품’으로 제출해 졸업심사를 받는다.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도 공대생들로 보이는 몇몇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게를 들락거리며 졸업작품을 문의하고 흥정을 붙이고 있었다. 일부 가게에는 ‘졸업작품 판매’라는 선전판을 버젓이 걸어 놓고 영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아예 지나가는 학생들을 호객하는 상인들도 눈에 띄었다.
과연 간단하게 머릿속으로 구상한 졸업작품을 아무런 설계도면도 없이 현장에 의뢰해 구입할 수 있을까. 기자는 공대생을 가장해 직접 졸업작품을 판매한다는 한 가게에 들어가봤다. 가게 업주는 학생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작품이면 거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귀띔했다.
기자는 작품에 응용될 프로그램도 없고 설계도면도 없는데 작품을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이에 가게 주인은 “우리가 직접 작품에 들어갈 프로그램을 짜 준다. 당연히 설계도면과 소스도 제공한다. 작품에 대한 설명도 철저하게 해준다. 생각하는 작품이 있으면 말만 해봐라. 향후 작품에 문제가 생겨 통과가 안 되거나 하면 A/S도 해주겠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돈’만 있으면 4년 과정을 평가하는 졸업작품 하나를 현장에서 뚝딱 만들어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자는 한 업주에게 ‘적외선 센서’를 응용한 자동냉방기기를 제출기간에 맞춰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 정도 작품이면 80만 원선에 맞춰주겠다”라며 곧바로 흥정을 붙였다. 현장 확인결과 공대생들의 졸업작품은 적게는 60만 원에서 많게는 130만 원까지 시세가 형성돼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무척 버거운 가격이었다.
기자와 만난 또 다른 업주는 아예 자신이 이미 다 만들어 놓은 작품이 있다며 ‘완성품’을 권하기도 했다. 그는 한 작품을 직접 꺼내 보이며 “내가 오래전에 만든 작품이다. 주차장에 들어선 자동차를 비어 있는 주차공간으로 안내하는 기능이 있는 작품이다. 수년 전에 S 대 공대생들의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인데 다른 것보다 싸게 해주겠다. 이미 오래전 작품이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겹칠 염려도 없다”고 상세히 설명했다. 아무런 작품 구상도 필요없이 졸업작품 하나를 버젓이 구입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대생들의 졸업작품은 이러한 오프라인 암시장 이외에 온라인에서도 거래되고 있었다. 한 유명 인터넷 중고품 직거래 장터에 들어가 보니 졸업작품을 판다는 의뢰인들의 상품공고와 구매를 원하는 구매 희망자들의 구매공고가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상품을 올려놓고 판매하는 의뢰인들 상당수가 공대생들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만들거나 구입해 졸업심사를 통과한 작품들을 다시금 온라인 시장에 내다파는 경우였다.
결국 한 학교에서 한 차례 졸업심사를 통과한 작품들이 다른 학교에서 다시금 재활용되고 있는 셈이었다. 상품공고 밑에는 제품을 구입하겠다거나 궁금한 사항에 대해 묻는 등 구입을 희망하는 공대생들의 댓글들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온라인 상품공고 내용은 더욱 가관이었다. 온습도 센서를 이용한 자동 습도조절기를 올린 한 공대생은 “우리 학교 교수님들로부터 최고점을 받은 작품이다. 상품을 보장한다. 뿐만 아니라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최종보고서와 상세설계도, 개념설계도, 프리젠테이션 파일 등 부수적인 자료도 전부 제공하겠다. 상품가격은 70만 원이며 직거래를 원한다”며 자신의 졸업작품 우수성을 노골적으로 선전했다. 해당 학생은 단순한 상품 제공은 물론 설계도, 보고서, 발표자료 등 지적 상품까지 모든 것을 판매하는 셈이었다.
이렇듯 문제는 꽤나 심각했다. 졸업 작품은 말 그대로 졸업을 앞두고 4년이라는 학부 수료과정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심사항목이다. 공학도들은 4년 수료과정에서 배운 학문적 이론을 토대로 졸업작품을 직접 설계해 제작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표절’과 ‘대필’이 횡행하는 국내 학문적 풍토가 젊은 공학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졸업작품 암시장이 오래전부터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 현장에서 만난 경기도 K 대 공대 4학년 이 아무개 씨는 이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그는 “우리는 취업을 목적에 둔 졸업생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취업준비하기도 빠듯하다. 열심히 준비해도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 어려운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런데 졸업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현실적으로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프로그램을 짜고 작품 설계와 소스를 마련하고 완성품을 만들어야 한다. 실제 작품을 만들려면 3명이 꼬박 1년 동안 달라붙어도 버겁다. 차라리 비싸더라도 조원들이 각자 돈을 분담해서 작품을 구입하는 게 훨씬 낫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대생 대다수가 그렇게 한다”라고 주장했다.
‘취업’이라는 현실적 목표 속에서 ‘졸업작품’이라는 학문적 결과물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표절’을 넘어 ‘암거래’로 졸업작품을 제출하는 공학도들에 대한 학교 당국의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