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의에서 이정희 전 공동대표가 안경을 만지고 있다. 유장훈 기자 |
이 전 공동대표는 이번 비례대표 사태가 “부정선거”가 아닌 “부실선거”였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 결국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이정희 전 공동대표는 이번 부정선거 의혹 정국에서 민심과 동떨어진 독단적 행보로 진보진영 전체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자폭정치’를 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이정희 전 공동대표의 사퇴 전 ‘몽니 행보’를 추적해봤다.
“17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이정희 전 공동대표는 지난 4년간 내가 지켜보며 좋아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4일 ‘무박 2일’로 진행된 통합진보당 전국 운영위원회 회의를 지켜본 한 통합진보당원의 말이다. 이날 이정희 전 공동대표는 일반 여론과 상식 수준을 벗어난 진행으로 일관, 지난 4년여 동안 열정적인 의정활동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아온 ‘그녀’가 과연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당내 비례대표 선출선거와 관련해 ‘부정선거’ 대신 ‘부실선거’라는 ‘정치적 단어’를 사용해 민심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였고, 진상조사위원회가 공개한 보고서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라며 폐기를 주장했다.
18대 국회에서 당찬 정치신인의 모습을 보였던 이 전 공동대표가 한순간 당권 사수의 전면에 등장해 ‘버티기 모드’를 고수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권 관계자들은 지난 5일 전자회의에서 의결된 비례대표 총사퇴 권고안을 무력화시키고 당권파가 지지한 비례대표 당선인을 국회에 입성시키기 위한 ‘꼼수’였다는 의견을 많이 내놓고 있다.
민주통합당의 한 당직자는 “이 전 공동대표는 지난 야권단일화 경선 당시 보좌관의 부정이 드러났음에도 일주일가량 사퇴를 거부하면서 버티다 결국 자기 쪽 사람(서울 관악을 이상규 당선인)에게 금배지를 물려주지 않았느냐”라며 “공동대표직을 물러나긴 했지만 이후 꾸려질 진상조사특위나 비상대책위는 인선에서부터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려 사태가 수습되기도 전에 19대 임기가 시작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그는 비당권파에서 ‘유령당원’을 문제 삼고 있는 것에 관해서도 “다른 공동대표들이 그녀의 전략에 말려들었던 것 같다. 당원 전수 조사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결국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당권파 출신 당선자가 국회로 입성할 가능성이 많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SNS에서는 당권파가 끝까지 ‘챙길’ 인물로 비례대표 이석기 김재연 당선인을 거론하고 있다. 정계 소식에 밝은 한 트위터 이용자(@*afeiT*****)는 “이석기 당선인은 현재 통합진보당의 자금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노동계의 지지와 후원금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를 쉽게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제2의 이정희’로 불리는 김재연 당선인 역시 이대로 사퇴시킬 경우 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한국대학생연합과 NL계 학생회의 내분이 일어날 수 있다. 때문에 이 전 공동대표는 두 당선인의 용퇴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내다봤다.
이 전 공동대표의 몽니가 비례대표 당선인들의 금배지 사수보다 국민참여당계와 유시민 전 공동대표에게 당권을 내주지 않으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 8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는 이정희 의원실의 주최로 ‘진상조사위원회와 보고서 재검증을 위한 공청회’가 다른 공동대표와 진상조사위원 전원이 불참한 가운데 개최됐다. 2시간여 가까이 진행된 공청회에서 이정희 전 공동대표는 홀로 80여 분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증거가 없거나 부실하다면 무죄다. 순수한 당원들을 죄인으로 몰아가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이어나갔다.
▲ 부정투표 파문과 관련해 열린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김선동 의원(맨 오른쪽)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앞서의 기자는 “이런 발언들은 비례대표 순번 결정이 당권파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니라 유시민 전 공동대표를 비롯해 비당권파와의 내부적 합의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 전 공동대표는 유달리 유시민 전 공동대표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당권파-비당권파 구도와 관계없이 이정희 전 공동대표가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한 버티기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참여당 출신의 당 관계자는 “이 전 공동대표는 이미 지역구 공천과정에서 불명예스럽게 사퇴한 경험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번 부정선거 공방 사태를 이 전 공동대표 개인의 독단적인 정치행위로 규정하며 “이 전 공동대표는 87년 연합고사에서 인문계 여자 수석으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간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까지만 해도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을 것이다”라며 “이번에 진상조사위 보고서나 언론 기사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을 보면서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앞서의 통신사 기자도 “이 전 공동대표는 시종일관 정치인이 아니라 변호인으로서 자신을 대변하고 있다”라고 평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공동대표가 지난 2008년 일심회 사건(2006년 10월 국가정보원이 적발한 간첩사건) 때처럼 당을 분당 수순으로 몰아가려 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통합진보당 지역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황 아무개 씨(26)는 “당권파는 물론 비당권파들도 서로 갈라설 경우 그들의 정치적 기반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에 분당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닌 것으로 본다.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전 공동대표나 진보신당 출신 심상정 전 공동대표도 역시 잦은 창당과 탈당이미지를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민주통합당 측도 이번 비례대표 사태가 조기에 봉합되지 않고 장기화될 경우 대선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진보당 일각에서는 “이정희의 자폭정치 때문에 진보진영이 다 죽게 생겼다”며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앞서의 황 씨는 “지금 상태에서 부정이니 부실이니 판단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이대로 가다간 새누리당은 물론이거니와 민주통합당에서도 ‘정권교체에 걸림돌이 된다’며 세찬 공격을 해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