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팜 사업비 독촉한 ‘수금 총책’ 2019년 갑작스런 공직 배제…북한 소식통 “황해도 농장서 농사”
김성혜 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책략실장 겸 조선아태평화위원회 실장은 최근 국내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키맨 중 한 명이다. 그가 북한 측 수금 총책이었던 까닭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북송금 의혹은 법적 측면에서 봤을 때 굉장히 특이한 사건”이라면서 “통상적으로 불법적으로 돈이 오가게 되면, 돈을 받은 사람도 조사해야 하는데 그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기도는 2018년 하반기부터 남북협력 사업을 준비했다. 대표적 사업 중 하나가 황해도 스마트팜 시범 운영이었다. 500호 규모 협력농장을 운영하는 방안이었다. 경기도와 인접한 황해도 내 북한 농축산 생산효율을 높이는 목적으로 추진됐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2018년 10월 방북한 뒤 황해도 스마트팜 사업에 대한 로드맵이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경기도와 황해도가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2023년 1월부터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은 북한에 돈을 보낸 이유에 대해 진술했다. 김 전 회장은 황해도 스마트팜 사업비용으로 500만 달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당시 경기도지사) 방북비용으로 300만 달러를 전달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요신문 취재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이 송금한 돈은 당시 대남공작 총책 역할을 하던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라인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전선부 책략실장이자 조선아태위 실장이었던 김성혜는 김성태 전 회장에게 송금을 독촉한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쌍방울 한 핵심 관계자가 검찰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2018년 12월경 김성혜가 김 전 회장에게 빨리 돈을 보내라며 압박했다. 당시 김성혜는 “인력도 집결시켰는데 이화영 부지사와 연락이 안 돼 내 목이 날아갈 상황”이라며 조급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송금을 시작한 것은 2019년 초부터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성혜의 독촉이 대북송금 절차를 앞당겼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대북송금이 이뤄졌을 때 대남 외교 실세라고 불렸던 김성혜는 2023년 지금 북한 공직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다. 김성혜가 공식 외교 무대에서 사라진 시기는 2019년 후반부로 추정된다.
한 대북 소식통은 2월 28일 김성혜 근황에 대해 들려줬다. 그는 “김성혜가 지금 황해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이는 혁명화 작업 일환이라고 알려졌다”면서 “아직 공직으로 복귀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김성혜는 북한 내부에서 대남 외교 실세로 통했다”면서 “김성혜가 요직에서 배제될 이유가 없는데, 배제돼서 무슨 죄를 졌느냐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이 불거지면서 이 사건이 김성혜 공직 배제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어 “4~5년 전만 해도 경기도와 함께 황해도 스마트팜 사업을 추진하다가 지금은 황해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근황이 돌고 있다는 상황이 굉장히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면서 “지금까지 김성혜가 북한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지 못했다는 건 앞으로도 복귀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대남 외교 실세인 김성혜가 2018~2019년경엔 중국에 나와 있다는 소식이 많이 들렸다”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의아한 시선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소식통은 “외교 실세가 중국에 나와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면서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관련 수사가 진행되면서 당시 미스터리로 남았던 부분들이 많은 부분 해소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탰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항상 북한 케이스에서 보면 사고 나는 문제가 주로 돈이다. 어디서든 돈을 받아오면 그 숫자가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북한 당국은 수금 책임자가 매수된 것으로 본다”면서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당국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숫자가 맞는지 여부를 체크하게 되는데 그 체크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북한 내부에선 큰 사건으로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타임라인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김성혜는 대북 소식통들 사이에서 ‘북한 왕실장’으로 통했다. 주요 조직에서 실장 직책을 달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북한 내부에서 흔치 않은 고위 여성 관료다. 대남 외교 실세라는 수식어를 단 인물이기도 했다. 1965년생 김성혜는 2010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외곽조직과 소속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이 됐다.
김성혜는 각종 이벤트를 발판으로 대남 외교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200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럽코리아 재단 이사장 재임 당시 방북했을 때 박 전 대통령을 밀착수행했다. 2011년 이희호 여사가 방북했을 땐 영접 역할을 담당했다. 2013년 열린 남북장관급회담 목적 실무회담에선 천해성 통일정책실장 카운터파트로 회담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기도 했다. 이 회담은 ‘남남북녀’ 회담으로 관심을 받기도 했다.
2018년 김성혜는 대남공작업무를 총괄하는 통일전선부 책략실장으로 영전했다. 2018년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남북정상회담 북한 측 수행단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대미외교에서도 핵심 인물 중 하나로 꼽혔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 수행단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당시 북한 외교라인 최우선 목적은 대북제재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외교부에 준하는 외무성 대신 대남공작부서인 통일전선부가 주도권을 잡고 대남·대미 외교전 선봉에 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최측근으로 꼽히는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겸 전 통일전선부장이 핵심이었고, 김 전 부장 오른팔 격으로 활동한 인물이 책략실장 김성혜였다. 다만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외교전 무게추가 다시 외무성 쪽으로 옮겨간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 외무성은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구축돼 있다. 최선희는 김성혜와 더불어 ‘비 백두혈통’ 북한 고위 여성 관료 투톱으로 꼽힌다.
김성혜가 공직에서 배제된 배경과 관련해서도 가장 많이 제기됐던 분석은 하노이 회담 결렬 책임설이었다. 그러나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관련 검찰 수사가 구체화되면서 복수의 대북 소식통들 사이에선 김성혜 실각 이면의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오르내린다. 바로 ‘돈 문제’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한국 언론을 통해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관련 구체적 송금 액수가 밝혀지면서 북한 현지에서도 쌍방울로부터 돈을 받은 관련자들을 문책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면서 “수금 루트를 거쳐 북한 당국이 실제로 받은 돈과 쌍방울이 건넨 돈 사이 숫자 차이가 있을 경우엔 관련자들을 향한 책임론이 내부적으로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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