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송파 일대에서 약 100억 원대 규모의 계를 운영하던 한 ‘귀족계’ 계주가 60억 원 상당의 곗돈을 들고 해외로 도피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귀족계’는 20~30%대의 높은 이율을 미끼로 내걸고 강남 부유층 및 권력층 부녀자들을 계원으로 끌어들인 모임을 뜻한다. 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지난달 귀족계 중 하나인 ‘정경회’ 계주 정 아무개 씨(여·65)가 서울 강남 일대 계원 10여 명으로부터 받은 곗돈 60억 여원을 챙겨 도주했다. 정 씨가 도주한 이후인 지난 5월 31일에 이 사건과 관련한 고소장이 처음 접수됐고,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자는 13명이다. 이른바 고위층 관계자들이 고액의 계모임에 가입했다가 큰 피해를 본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다복회’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금복회’(7월)와 ‘만복계’(9월) 사건이 연달아 터져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또 다시 불거진 강남 귀족계 사건의 전말 및 그 원인을 진단해 봤다.
계주 정 씨는 기존의 은행 금리를 크게 웃도는 파격적인 이자율을 미끼로 피해자들을 끌어들였다. 정 씨는 2010년 8월부터 “매달 수백만 원씩 내면 제도권 연이율 20~30%의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며 귀족계의 일종인 ‘정경회’를 설립, 계원들을 모집했다. 연이율 20~30%는 기존 제도권 은행 이자율에 5~6배가 넘는 수준이다.
또한 정 씨는 “매달 500만 원씩 총 1억 3000만 원을 내면 26개월 뒤에 6000만 원을 더 받을 수 있다”면서 정해진 만기 순서대로 억대의 곗돈을 탈 수 있는 ‘번호계’ 방식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최소 약 3000만 원에서 최대 1억 원 상당의 곗돈을 부었다. 담당 수사팀장은 6월 1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신고자 13명으로부터 접수된 피해액은 약 60억 원이지만 추가 피해자를 감안할 때 피해 규모는 100억 원대로 추정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정 씨는 초반엔 개인 친분을 이용해 주위 사람을 끌어 모았다”며 “수법으로 봤을 때 피해자와 피해액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경찰 측에선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정경회’ 피해자 중에는 법조계 고위 공직자 가족과 경찰 고위층 부인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위직 가족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귀족계에 덥석 가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 씨의 화려한 ‘인맥자랑’이 한몫을 했다고 한다. 몇몇 피해자들에 따르면 정 씨는 평소 “사위가 법조계 고위층이다. 우리 계원 중에는 경찰 부인도 있다”며 유력 인사들을 거론하는 수법으로 계원을 모집했다고 한다. 이 말에 안심한 피해자들은 곧바로 높은 이율에 관심을 돌려 1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정 씨에게 넘긴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정 씨는 높은 금리와 유명인사 와의 친분 등을 앞세워 피해자들을 현혹한 셈이다. 이러한 사기수법은 정 씨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기 방식을 최초로 사용한 사례는 귀족계의 원조격인 ‘다복회’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난 2008년 계주가 무려 374억 원의 곗돈을 들고 달아나 충격을 던져줬다.
당시 다복회 계주 윤 아무개 씨(여·54)는 2004년 5월경 다복회를 만든 후 “일반 사업보다 10배를 벌 수 있고 세금도 내지 않는다. 유명 인사들도 많이 가입했다”고 속여 2008년 10월까지 148명에게 약 400억 원을 받아 챙겼다가 같은 해 경찰에 붙잡혔다.
2009년에 터진 ‘한마음회’ 사건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한마음회 계주 이 아무개 씨(여·55)는 사무실에 자신과 김대중 전 대통령, 고건 전 국무총리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 유력 정치인들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며 신뢰감을 높이는 수법으로 계원들을 끌어 들었다. 이 씨가 계원 70여 명을 상대로 편취한 돈은 100억 원에 달했다. 당시 한마음회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북한 출신 유명인사의 전 부인과 원로 탤런트의 부인 등이 가입한 것으로 확인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최근에 터진 100억대 강남 귀족계 먹튀 사건 관련 KBS 뉴스 화면 캡처. |
한때 모 귀족계 계주의 일을 도왔다는 한 관계자는 6월 20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귀족계는 여유 자금이 있는 부자들에겐 ‘밑져도 상관없는 게임’이다. 워낙 높은 금리로 운영되고 있고 계주들이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는 등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친목도모 차원에서도 많이 가입한다”고 귀띔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김홍중 교수는 “여유자금을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 사회적 시스템 상에서 귀족계라는 변형투자가 발생한 것 같다”며 “귀족계 내부에 고위층 인사가 한 명이라도 소속돼 있으면 ‘안전망’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고위층이건 서민이건 이런 것에 현혹되기 쉽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