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에서 가화를 사용하는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삼국시대부터 복식이나 장신구로서 가화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가령 백제시대에는 6품 이상의 관복에 은화(은으로 만든 가화)로 갓을 장식하도록 하였고, 왕이 머리에 금화(금으로 만든 가화)로 꾸민 오라관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화의 풍속이 더욱 성행해, 궁중의 진연(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베푸는 잔치)이나 기로연, 경로연 등의 의식에서 채화를 꽂아 장식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성대한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머리에 꽃을 꽂아 경사스런 분위기를 나타내고,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에는 가화로 장식한 화준(꽃무늬가 있는 항아리)을 놓고, 음식상에도 상화를 꽂아 아름답게 장식했다.
당시 종묘, 제향 등의 일을 관장하는 ‘봉상시’에 6인, 각종 물자를 관장하던 호조 소속의 ‘내자시’에 2인, 빈객·연향 등을 관장하던 예빈시에 6인의 화장이 소속돼 일했다고 하니, 얼마나 채화 문화가 깊게 뿌리내렸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생화는 쉽게 시들기에, 이를 꺾어서 장식하는 것을 금하던 궁중의 법도도 궁중채화가 성행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의궤’ 등에 따르면 또한 조선조에서 쓰인 가화(채화)는 머리에 착용하는 관이나 모자 등에 꽂아 장식하는 ‘잠화’, 연회 등에서 상차림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용도의 ‘상화’, 특정 장소를 장식하기 위하여 커다랗게 만들어 꽃병에 꽂은 ‘준화’, 궁중의 의례나 종교 의식, 또는 각종 민속 의례에서 의물로 사용된 ‘의장화’ 등으로 분류된다.
또한 가화를 만드는 재료에 따라 저화(모시로 만든 꽃), 사권화(거친 비단과 철사 등으로 만든 꽃), 사화(색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꽃), 지화(종이로 만든 꽃), 납화(밀랍으로 염색하여 만든 꽃), 금화, 은화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조선의 궁궐을 아름답게 물들였던 궁중채화는 일제강점기 때 문화말살 정책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옛 문헌을 연구하고 종이꽃 제작 기법 등이 간직된 사찰이나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한 끝에, 맥이 끊겼던 궁중채화를 복원한 주인공이 바로 현 궁중채화 기능보유자인 황수로(본명 황을순) 명인이다. 그가 ‘의궤’ 속 채화를 되살린 작품을 내놓음으로써 궁중채화는 세상에 알려졌고,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궁중채화는 공경과 존중의 뜻을 표현하거나, 평화·장수·건강 등의 상징으로 꽃을 이용한 궁중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황수로 선생이 설립한 한국궁중꽃박물관에서 궁중채화 작품 감상은 물론 제작 체험도 가능하다.
자료협조=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