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과 형 이맹희 씨가 상속재산을 놓고 치열한 법리공방을 벌이고 있다. 이 와중에 삼성가 비밀들이 공개돼 주목을 끌고 있다. |
지난 2월 12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 이맹희 씨가 동생인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주식인도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양측의 소송전은 막이 올랐다. 이 씨는 “지난해 6월 이 회장 측으로부터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에 관한 문건을 받은 뒤 차명주식에 대한 존재를 알게 돼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이 씨는 이 회장이 은닉해 온 삼성생명 주식 824만 주와 삼성전자 주식 20주 및 주식 배당금을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이 씨는 또 삼성에버랜드 김봉영 대표이사를 상대로도 삼성생명 주식 100주와 주식 배당금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씨 몫으로 주장하는 주식과 배당금을 합한 총 금액은 무려 710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어 지난 2월 27일에는 이병철 회장의 차녀 이숙희 씨가 소송에 합류했고, 3월 28일에는 차남 이창희 씨의 둘째 아들인 고 이재찬 씨의 부인 최선희 씨와 두 아들이 추가로 소송을 제기했다. 숙희 씨는 1900억 원, 선희 씨 측은 1000억 원을 원고 소가로 설정했다. 이맹희 씨 측 소송 가액과 합산될 경우 총 1조 원이 넘는 금액이다.
이처럼 삼성가 형제들이 이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이 회장은 발끈하며 법적 대응을 선언했다. 그는 지난 4월 17일 “(소송에 맞서) 대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라도 갈 것이다”며 치열한 법정공방을 예고했다.
# 나는 참칭상속인이다
이 회장이 예고한 것처럼 양측의 갈등은 결국 법정으로 이어졌고, 지난 5월에 열린 1차 공판에 이어 2차 공판에서도 팽팽히 맞섰다. 6월 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민사32부 심리로 ‘삼성가 상속재산 분쟁’의 두 번째 공판이 열렸다. 이번 2차 공판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사안은 이 회장의 ‘참칭상속인 여부’ 및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이었다. 지난 1차 공판에서도 공방이 오갔던 이 회장의 참칭상속인 여부는 2차 공판에서도 계속됐다.
참칭상속인이란 법률적 상속권이 없음에도 상속인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문제는 이 회장 측에서 “이 회장이 진정한 상속인이지만 참칭상속인이기도 하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진짜 상속인을 자처한 이 회장 측에서 스스로 이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상속회복청구권 제척기간이라는 소멸시효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상속회복청구권 자체가 진짜 상속인이 참칭상속인에게 침해행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때 제기하는 권리라는 점에서 이 회장 측은 제척기간 소멸시효를 주장하기 위해 우선 참칭상속인임을 자처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씨 측은 “이 회장은 상속을 근거로 명의 변경을 하지 않고 그동안 주식을 은닉해 왔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참칭상속인이 될 수 없다. 또 이 회장이 주권을 점유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참칭상속인에 의한 상속권 침해행위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상속회복청구권 제척기간
우선 침해행위가 있은 날에 대해서 이 회장 측은 “이 회장이 이병철 선대회장 타계 이후 참칭상속인으로서 차명주식을 관리해 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침해행위가 있은 날은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날부터 시작돼 이미 25년이나 지난 시점으로 제척기간(10년)이 지났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 씨 측은 “선대 회장이 타계한 1987년부터 ‘침해행위’가 있었다면 참칭상속인으로서 이 회장이 대외적, 대사회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예를 들어 주식에 대한 명의 개시가 있었어야 하는데 차명주식으로 ‘은닉’해온 탓에 침해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자 이 회장 측은 “선대 회장 당시 구 증권거래법상 주식취득 제한으로 대주주의 안정적 경영권 확보를 위해 주식을 차명으로 보유한 것이지 숨긴 적이 없다”고 재반박했다. 이에 대해 이 씨 측은 “잘 숨길수록 자신의 것이 된다는 도둑놈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며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이 씨가 ‘그 침해를 안 날’이 언제였느냐 여부도 쟁점사항이다. 이에 대해 이 회장 측은 “2008년 삼성특검의 차명주식 조사 발표 및 2009년 삼성생명 실명전환 공시 때 이미 차명주식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원고들도 이미 차명주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원고들에게 숨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 침해를 안 날로 부터의 제척기간인 3년은 이미 지났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이 씨 측은 “이 회장으로부터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 자료’를 받은 지난해 11월이 이맹희 씨가 침해를 안 날이다. 제척기간이 지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 씨 측의 주장에 따르면 3년의 제척기간은 2014년 5월이 돼야 만료된다. 양측의 공방전에 대해 이날 재판부는 “이 씨 측(화우)이 주장하는 시점을 기산점(제척기간 소멸시효)으로 하면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은 많이 남았다”며 서둘지 않고 충분히 검토한 후 판결을 내릴 것임을 시사했다.
이 공방 속에 이 씨 측은 지난 5월 30일 열린 1차 공판에서 상속회복청구와 함께 ‘소유권에 의한 소유권반환청구’를 함께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이 회장 측에서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소가 각하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소유권반환청구권은 상속회복청구권과 달리 제척기간이 아예 없다.
▲ 이건희 회장은 상속받은 삼성생명 차명주식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988년 삼성생명 주주명부를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재판부가 확인을 위해 삼성 비자금 특검 조사 내용을 다시 들여다볼 수도 있다. 일요신문DB |
치열한 법리 공방 속에 서로의 치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차명주식 여부를 몰랐다는 이 씨 측의 주장에 이 회장 측은 “손복남 씨(CJ 고문·이맹희 씨 부인)도 안국화재 등 다른 계열사의 차명주식을 받았고, 이숙희 씨 등도 모두 다른 계열사의 차명 주식을 받았다. 또 이맹희 씨 부인과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등도 이병철 선대 회장의 상속으로 차명주식을 갖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 회장 측은 “원고 측(이맹희)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차명 계좌를 통해 배당금을 수령하고 의결권을 행사하는 걸 알고 있다”며 “차명주식의 존재 여부를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씨가 참칭상속인에 의한 침해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 소송은 각하돼야 마땅하다는 논리를 펼치기 위해 이제까지 밝혀진 적이 없었던 삼성가의 차명주식 보유 사실을 드러낸 셈이다.
# 삼성생명 주주명단 ‘불씨’
이밖에도 이 회장 측은 이 씨 측이 차명주식을 ‘은닉 주식’이라는 비하적인 용어를 쓰고 있다고 항의하는 등 ‘은닉’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 회장 측은 “이병철 선대 회장 생존 시기인 지난 1974년, 대통령 특별 지시로 ‘기업 대주주의 차명주식 보유 한도’를 10%로 제한함에 따라 선대 회장이 부득이 안정적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차명주식 형태로 주식을 보유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이 회장 측은 이 회장이 정당하게 주식을 물려받았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차명주식 현황이 담겨 있는 1988년 삼성생명 주주명부를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 씨 측은 “삼성비자금 특검 때도 밝혀지지 않았던 자료를 이 회장 측이 내놓았다”며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차명주식 거래내역과 관련한 증거조사가 꼭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특검 기록에 대한 증거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조사범위에 대해서는 양측의 입장을 들어본 후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이 회장 측에서 제출한 1988년 삼성생명 주주명단은 향후 전개된 소송전을 달구는 또 다른 불씨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훈철 기자 boaz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