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1년 3월 1일 사건 현장에서 남편 백 씨가 현장검증을 했다. 백 씨는 현재 1년 4개월째 수감 중이다. 연합뉴스 |
이 사건은 부인이 욕실에서 발견됐다는 점, 정황상 남편이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됐다는 점 등에서 1995년 ‘치과의사 모녀살해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다. ‘치과의사 모녀살해 사건’에서 용의자로 지목됐던 남편은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법원과 고등법원을 오간 끝에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법의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한 상태다. 무엇보다 추후 검찰이 재판부를 납득시킬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 역시 미궁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 유명 법의학자들을 통해 추후 재판의 향방을 알아봤다.
대법원이 원심을 깨고 고법으로 사건을 파기환송한 결정적인 이유는 ‘치과의사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형사재판에 있어 범죄사실의 인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갖게 할 증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번 파기환송을 놓고 법의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한쪽에선 ‘대법원이 의학적 입증이 어려운 부분을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가 하면, 또 다른 법의학자들은 ‘피의자의 이익을 우선 전제로 해야 하는 살인죄 판단인 만큼 엄격한 법적 증거를 요구하는 대법원의 의견이 옳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위 두 사건은 재판 쟁점으로 ‘사망원인’, ‘사망시각’을 다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범행의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어렵고 범행 당시 목격자가 없다는 점도 유사하다.
우선 이번 대법원의 파기환송과 관련 이윤성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등 국내 유명 법의학자들은 “박 씨가 타인에 의해 목이 졸렸다는 증거가 부족한데다가 임신여성의 5% 정도는 갑자기 실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때문에 대법원이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 같다”는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남편 백 씨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추정하는 의견 역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윤성 교수는 4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임신여성이 실신하는 일이 있을 수는 있으나 실신했더라도 이번 건처럼 목이 꺾여 사망할 정도로 실신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며 의문을 표했다. 백 씨 측 증인으로 나온 마이클 폴라넨 캐나다 토론토대 법의학센터장도 “갑작스러운 실신으로 인한 사고사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법정에서 박 씨의 부검 사진을 본 뒤 “액사(목을 졸라 죽임) 가능성이 있음에 대해선 일부분 인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사망시각이다. 대법원은 박 씨가 백 씨가 나간 후 살해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치과의사 사건’의 경우 당시 국내법의학자들은 “의사 남편이 출근 전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사고사로 위장했다”고 주장했으나 사망시각을 정확히 밝히기 어렵다는 외국 법의학자의 증언이 힘을 받으면서 결국 무죄가 선고됐다.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정확한 사망시각을 밝혀내기 위한 치열한 법정공방이 예고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치과의사 사건’에서 피의자를 변호했던 김형태 변호사는 4일 “백 씨의 알리바이 증언이 자꾸 바뀌는 모습을 보니 솔직히 내가 봐도 이상하더라. 그러나 형법상 피의자가 알리바이를 대지 못했다고 해서 유죄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어 김 변호사는 “유죄로 확신할 만큼 증거가 충분치 않다면 ‘피고인의 이익’에서 판단해야 한다. 즉 검사가 적극적으로 피의자의 범죄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만큼 ‘합리적 근거’를 대라는 대법원 판결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종 판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생각보다 길고 치열한 공방이 전개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치과의사 사건의 경우 사형-무죄-무죄 파기환송을 거쳐 최종 무죄 판결이라는 드라마틱한 수순을 밟았다. 최종판결까지 무려 7년 8개월이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어떻게 진행될까. 취재 결과 이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과의 한 관계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며 재판이 장기화될 것을 암시했다. 반면 앞서의 김형태 변호사는 “1년, 늦어도 2년 안에 끝날 것 같다”고 추측했다. ‘치과의사 사건’의 경우 관련 쟁점이 20개가 넘었는데 이번 건은 4~5개의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재판의 장기화 여부는 유죄와 무죄를 판가름할 수 있는 쟁점이 무엇이고, 그것을 법정에서 얼마나 신속히 풀어나가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만삭부인 사망 사건’의 주요 쟁점은 ▲사망시각 ▲직접사망원인 ▲살해동기 등 크게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중 전문가들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살인동기’다. 살인동기가 미약한지 여부는 사망시각이나 원인 등과 같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증으로 가려질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남편 백 씨가 밤새 게임을 하다 부인과 다툰 끝에 살인에 이르렀다는 검찰 측 주장에 대해 ‘살인 동기가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어떤 행위를 발생시키는 동기가 충분했는지를 따지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이 사건의 경우 부부싸움이 살해동기가 되는지 가리기가 까다롭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윤성 교수는 “어느 선까지를 두고 살인의 동기가 있었다, 없었다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남이 보기에는 하찮을지라도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이 사건은 박 씨의 오른쪽 눈가에서 발견된 혈흔과 팔·다리의 멍, 얼굴 상처, 목피부의 까짐, 침대패드와 옷의 혈흔 등 세세하고도 까다로운 쟁점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일례로 눈가에서 귀 쪽 방향으로 흘러나온 핏자국을 두고 국과수 측은 박 씨가 욕실 밖에서 사망한 후 무리하게 욕조로 옮겨졌기 때문에 핏자국이 아래가 아닌 옆으로 흘러내렸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망 도중에 고개가 움직이는 등 우연에 의해 피가 가로로 흐를 수도 있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지난해 2월 구속된 백 씨는 1년 4개월째 수감 중이다. 무죄 확정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검찰이 살인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 무죄 판결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