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련과 정치권이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허창수 회장(가운데)은 ‘침묵모드’로 일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열린 전경련 회의. 사진공동취재단 |
GS그룹 회장으로서가 아닌 전경련 회장으로서 허창수 회장의 모습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지난 6월 16일 멕시코에서 개최한 ‘G20 비즈니스 서밋’에 참가하는 등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일부 대외활동은 하고 있다. 하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대내적으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전경련과 정치권의 관계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다”고 말했다. 그만큼 현재 상황이 급박하다는 얘기다. 전경련은 직간접적으로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일련의 움직임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시선은 전경련에 우호적이지 않다. 오히려 전경련이 목소리를 높일수록 돌아오는 것은 더 거센 비판이다. 그중 헌법 제119조 2항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전경련은 한국경제연구원을 통해 이 조항을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전경련의 행동에 대해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경제쿠데타’로 규정하고 “당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일환으로 민주당은 지난 9일 출자총액제한제도 도입,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 재벌개혁과 관련한 법안을 무더기 발의했다. 차기 대권에 가장 가까운 박근혜 대선예비후보 캠프의 김종인 공동선대위원장도 “그런 쓸데없는 논란을 일으킬 거라면 차라리 전경련을 해체하는 게 낫다”고까지 말했다. 상황이 이러한데 허창수 회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허 회장의 ‘자중 모드’는 지난해와 비교하면 전혀 딴판이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6월 21일 허 회장은 전경련과 재계를 대표해 정치권에 잇달아 쓴소리를 토해냈다. “선거를 앞두고 쏟아지는 포퓰리즘성 정책에 대해 재계 의견을 제대로 내겠다”며 결의에 찬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의 달라진 허 회장의 모습은 정부를 향해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던 전임 조석래 회장과도 비교되는 부분이다.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경련 내에서 소외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회장단회의를 비롯한 전경련 행사에 재벌 총수들의 참석률이 저조하다는 것이 가장 눈에 띈다. 무엇보다 4대그룹(삼성, 현대차, SK, LG) 회장들이 회장단회의 등에 참석하지 않은 지 꽤 됐다는 것이 허 회장에게 힘이 실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4대그룹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대내외적으로 경기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기업을 추스르기에도 여념이 없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재벌 총수들뿐만이 아니다. 전경련 내부적으로 허 회장은 상근부회장을 비롯한 내부 임원들과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단적인 예가 정병철 상근부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차세대 리더십 캠프’다. 로비 의혹이 짙어지자 캠프를 취소하기는 했지만 당초 이 사안이 전경련 내부적으로 허 회장까지 보고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사전 결재를 위해 회장에게 보고되는 사안이 아니다’라는 이유에서다.
이유의 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전경련이 하는 행사를, 그것도 국회의원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중요한 행사를 회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추진했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힘들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전경련의 행보를 보면 회장은 없고 단체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전경련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전경련의 운영과 시스템은 상근부회장 중심으로 돌아간다”면서도 “하지만 월급쟁이 신분으로서 조직의 수장을 절대 무시하지는 못한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전경련의 양철’로 불리는 정병철 부회장과 이승철 전무를 비롯해 인사와 조직 개편을 단행했어야 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허창수 회장의 이미지는 조용하다. 허 회장에게 붙은 ‘은둔의 경영자’, ‘영국신사’라는 별명이 이를 잘 대변한다. 전경련 회장으로 선임될 당시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전임 조석래 회장이나 이건희 삼성 회장처럼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한 대기업 임원은 “재계 대표로서 반성할 건 반성하고 할 말은 해야 하는 시기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재계 일부에서는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판에 GS그룹이 수입차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렉서스를 수입·판매하고 있는 센트럴모터스에 이어 GS넥스테이션이 폭스바겐코리아의 새로운 딜러로 선정될 것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두산이 수입차 사업에서, LG가 와인사업에서 철수하는 등 대부분 재벌이 동반성장에 동참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GS그룹 측은 허창수 회장과 관련 없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두 회사는 엄연히 허창수 회장이 ‘동일인’으로 돼 있는 GS그룹의 73개 계열사에 포함돼 있다.
지난 3일 허창수 회장은 각계 대표 11명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를 열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 과제를 마련해 제시하겠다”며 오랜만에 전경련 회장으로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차기정부 정책과제’에 대한 논의였지 현재 상황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앞서의 재계 고위 관계자는 “허창수 회장이 워낙 조용한 스타일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라면서도 “그래도 요즘 같은 때 재계 대표로서 목소리를 내거나 그게 아니라면 폭발 직전에 있는 정치권과 전경련의 관계를 조율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