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처럼 만나 서로의 꿈을 성공으로 이끌어주었던 소니 보노(왼쪽)와 셰어. |
가수이자 쇼 엔터테이너이며 <문스트럭>(1987)을 통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이기도 한 셰어. 하지만 그녀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다. 도박꾼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는 셰어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떠났고, 이후 어머니는 8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반항적인 성격으로 자란 셰어는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배우 수업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룸메이트와 함께 할리우드 대로에 있는 커피숍에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당시 27세였던 소니 보노는 음반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사실 보노가 관심 있었던 건 셰어의 룸메이트였지만 이후 그는 셰어와 친한 관계가 된다. 이때 룸메이트가 독립하자 셰어는 집세를 같이 낼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녀의 룸메이트 제의에 보노는 당장 달려왔다. 각방을 쓰던 그들 사이엔 로맨틱한 감정이 생겨났고 곧 연인이 되었다.
보노는 말한다. “그녀는 16세였고 남편과 아버지와 오빠가 필요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 되었다.”
배우 지망생인 셰어에게 보노는 연기보다 노래가 더 가능성 있다고 설득했고, 백업 보컬이나 클럽 가수 등을 전전하다가 1964년에 ‘시저 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듀오를 결성했지만 음반은 실패한다. 같은 해 9월 ‘소니 앤 셰어’로 이름을 바꾼 그들은 ‘Baby Don’t Go’로 첫 히트를 기록했고, 10월 27일에 멕시코의 한 호텔 룸에서 싸구려 반지를 주고받으며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증인이 없기에 그들의 결혼은 법적 효력을 지닐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1969년 3월에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엔 법적인 부부 관계를 갖추었다.
1965년에 당대의 명곡 ‘I Got You Babe’가 메가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들은 <에드 설리번 쇼>를 비롯한 10여 개의 TV 쇼를 누비는 빅 스타가 되었고, 그 해 1년 동안 빌보드 차트 20위 안에 5곡을 랭크시킨다. 이것은 비틀즈나 엘비스 프레슬리나 롤링 스톤즈 급의 대기록이었다.
하지만 운은 길지 않았다. 특히 영화에 대한 욕심은 큰 화를 불러왔다. 카메오로 등장해 노래를 불렀던 <와일드 온 더 비치>(1965) 정도가 적당했다. <굿 타임스>(1967)의 흥행은 거의 재난 수준이었다. 1969년에 딸 채스터티(Chastity)가 태어나자 보노는 딸 이름을 따고 아내 셰어를 주연으로 한 <채스터티>(1969)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19만 달러의 빚만 남겼다.
새로운 운은 TV에서 왔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진 <소니 앤 셰어 코미디 아워>는 슬랩스틱과 라이브 음악과 콩트로 구성된 쇼였는데, 단 한 번도 시청률 10위권 밖으로 떨어지지 않은 히트 쇼였다. 그들은 돈 방석에 앉았고 25개의 방이 있는 벨에어의 저택에서 수많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생활했다. 수십 대의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셰어는 행복하지 않았다.
“실생활에서 보노는 독재자 같았다. 난 내 의견을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며 당시를 회고하는 셰어는 항상 아팠고,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으며 불면증에 시달렸다. 174cm의 큰 키에 체중은 42kg에 불과했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셰어는 보노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따스함을 원했지만, 성공가도를 달리던 보노는 어느새 강요하는 남편이 되어 있었다. 셰어는 1972년 중반에 별거를 요구했다. TV 쇼를 위해 보노는 만류했지만 1973년 11월에 셰어는 딸과 함께 집을 떠났다. 하지만 TV 쇼는 여전히 인기였다. 셰어는 1974년에 이혼 소송을 하며 비록 이혼을 하더라도 캐롤우드의 대저택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보노는 자신의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셰어의 공동 소유권을 인정했다. 1974년 7월 셰어는 새 애인인 데이비드 게펜과 함께 돌아와 집의 가장 큰 방을 차지했다. 1975년 6월에 그들은 법적으로 갈라섰다. 각자 <보노 코미디 풍자 쇼>와 <더 셰어 쇼>를 이끌던 소니 보노와 셰어는 1976년에 <소니 앤 셰어 쇼>로 다시 뭉쳤다. 예전의 화학 작용은 없었지만 그래도 쇼는 1년 넘게 유지되었다. 1979년엔 <마이크 더글러스 쇼>에서 만나 함께 노래를 불렀고, 1987년엔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그들의 불후의 명곡인 ‘I Got You Babe’를 부르기도 했다. 법적인 부부는 아니지만, 그들 사이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좋은 기억들은 여전했던 것.
1975년 이혼 후 셰어는 배우로 성공했고 라스베이거스 쇼의 여왕이 됐으며 피트니스 비디오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키스’의 진 시몬즈나 ‘본 조비’의 리치 샘보라 같은 뮤지션, 그리고 발 킬머, 톰 크루즈 등의 배우들과 화려한 스캔들을 뿌리기도 했다. 보노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팜 스프링스 시장을 거쳐 공화당의 하원의원이 되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순항하던 소니 앤 셰어. 하지만 1998년 보노는 가족들과 휴가를 즐기던 중 스키 사고로 사망했다.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장례식에서 셰어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눈물의 추모사를 남겼고, 다음 해 <그리고 비트는 계속된다: 소니 앤 셰어 스토리>(1999)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소니 보노와 셰어는 마치 동화처럼 만나 꿈을 이루었던 커플이었다. 하지만 꿈이 이뤄지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따금씩 파트너를 이루며 예전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한편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채스터티 보노는 2009년에 남자로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채즈 보노라는 이름으로 엔터테이너로 활동 중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