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 농민운동가 1991년 경희대학교 단과대학생회장 시절 전남 순창으로 농촌활동을 갔다가 순천시내에서 거리행진을 펼치고 있는 모습. 앞줄에 청바지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사람이 박 의원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한창인 당시 ‘농민의 생존권과 수입개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시위였다. |
▲ 박홍근 의원. |
1988년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한 박 의원은 애초 학생운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국문학과를 선택했던 이유도 자신의 꿈이었던 언론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사실 박 의원은 학기 초 학생운동의 길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자신에 대한 집안의 기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를 회상하던 박 의원은 “학생운동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로서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박 의원은 “투철한 역사의식보다는 정의감에서 시작됐다. 당시 문무대(80년대 대학생들을 1주일간 군사훈련 시키던 군 교육기관)에서 경험한 부당한 대우가 나를 운동가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이후부터 박 의원의 삶은 투쟁적이었다. 1988년 5공 청문회가 열리자 박 의원은 친구들과 전두환 전 대통령 사저 앞에 찾아가 시위를 벌였다. 또 1991년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박 의원은 당시 노태우 정권말기에 발생한 ‘수서비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시위를 벌이다 50여 일 동안 성동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박 의원이 단순 운동권 출신을 넘어 한 단계 발전하게 된 출발점은 바로 청년문제 해결에 앞장서며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박 의원은 재야방식의 운동권 문화에서 탈피하고자 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대중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그 일환으로 2000년 청년정보문화센터를 개설한 그는 5년 동안 상근활동가로 봉사했다.
마지막으로 초선의원으로서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박 의원에게 던졌다. 박 의원은 “운동가로서의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당당히 말했다. 또 “대학 입시제도와 반값 등록금, 사교육 등 교육분야에 문제가 많다. 교육과 청년문제에 역점을 두고 지금까지 구상해 온 아이디어를 법제화시켜 나갈 계획에 있다. 지켜봐 달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훈철 기자 boaz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