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전당대회(8월 20일) 직전 박근혜 캠프 주변에선 다소 의외의 소문이 돌았다. 박 후보가 경선이 끝난 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봉하마을 방문을 검토 중이란 내용이었다. 일찌감치 박 후보의 낙승이 점쳐졌던 터라 경선 결과보다는 오히려 이를 확인하려는 취재진들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예상대로 새누리당 대선후보에 선출된 박 후보는 8월 21일 오후 전격적으로 노 전 대통령 묘지를 참배하고 권양숙 여사와 20분간 환담을 나눴다. 박 후보의 봉하마을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후보는 “대한민국의 한 축을 이루고 계신 전직 대통령이시기 때문에 참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박근혜 후보가 21일 의원총회에서 활짝 웃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1일 노무현 묘소 참배. 출처=박근혜 홈페이지 |
박 후보의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 후보는 봉하마을 방문 다음날인 22일 오전 김영삼 전 대통령(YS) 상도동 자택을 예방했다. 차남 김현철 씨의 4·11 총선 공천탈락 등으로 인해 박 후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YS는 박 후보에게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참 중요한데 잘 하시라”며 격려했다. 불과 한 달 전 박 후보에게 ‘칠푼이’라며 막말을 했던 YS이었기에 둘의 만남은 더욱 주목을 끌었다.
▲ 22일 이희호 여사 예방 장면. 사진공동취재단 |
정치권에서는 박 후보가 YS 및 이 여사를 찾아간 것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신의 부친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최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두 전직 대통령을 끌어안고 가겠다는 제스처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캠프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산업화 세력’과 YS·DJ가 주도했던 ‘민주화 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불행했던 과거에 얽매여 있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자는 박 후보 의지도 담겨 있다”고 귀띔했다.
또한 장준하 타살 의혹, 5·16 발언 등 과거사 문제로 인해 박 후보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점에서 대선 전략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전직 대통령들과의 화해를 통해 과거사 논란을 극복하겠다는 박 후보 의중이 반영됐다는 얘기다. 그동안 유신시절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여 왔던 박 후보는 향후 대권 레이스에서 보다 전향적인 태도로 대응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후보의 이러한 행보에 야권에서는 내심 당혹해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아직 후보조차 확정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 후보에게 야권의 전통 지지층을 빼앗길 우려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에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들은 박 후보를 겨냥해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손학규 후보 측 김유정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 3주기 때까지 한 번도 안 오다가 대선 후보가 된 뒤 참배한다는 것은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폄하했고, 김두관 후보 측 전현희 대변인도 “고인에 대한 모독이다. 노 전 대통령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먼저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문재인 후보 측은 “박 후보의 노 전 대통령 묘소 참배를 환영한다”며 긍정적인 논평을 내놨다. 대권 출마가 임박한 안철수 원장 역시 “박 후보가 봉하마을을 방문하고 이를 문 의원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것이 국민이 원하는 정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실 새누리당도 박 후보의 노 전 대통령 묘역 참배, YS 및 이 여사 방문 등이 ‘정치 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야권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단지 찾아갔다고 끝나는 게 아니지 않느냐. 박 후보 본인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면서 “사과할 것은 해야 하는데 그런 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박 후보 측이 9월말경 구성될 대선 캠프 인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캠프 관계자는 “국민대통합이라는 슬로건이 말 뿐인 구호나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사들을 포함시킬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를 위해 우선 박 후보는 당내 비박주자들과 친이계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채비를 하고 있다. 8월 24일엔 경선 내내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김문수 경기지사, 김태호 의원, 안상수 전 인천시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등 비박주자 4인과 만났다. 또한 경선룰에 불만을 제기하며 중도 포기했던 친이계 이재오·정몽준 의원과의 회동도 추진 중이다. 친박 핵심 이정현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이재오·정몽준 의원은) 영향력이 큰 분들이고 당의 소중한 자산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모시고 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박 후보는 당의 전현직 소장파 의원들과도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할 계획이다. 친박 내부에선 이들을 대선 캠프 명단에 포함시키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가 나오기도 하지만 박 후보 의지가 강하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는 관측이다.
박 후보는 계파와 이념을 초월한 중도·진보 인사 스카우트에도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얼마 전 박근혜 캠프에 합류한 DJ 처조카 이영작 전 한양대 석좌교수가 그 신호탄이 될 전망이다. 이희호 여사 둘째 오빠 이경호 씨의 장남인 이 전 교수는 DJ를 대통령으로 만든 숨은 전략가로 꼽힌다. 한 친박 의원은 “상징성도 있고, 선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친박은 올 초부터 새누리당 취약 지역인 호남 공략의 일환으로 동교동계와의 관계 개선도 모색해왔다. 총선 직전 박 후보가 동교동계 좌장급인 H 전 의원에게 협조를 부탁했다는 얘기도 공공연하게 돈 바 있다. 이미 여의도 주변에선 박 후보 지지를 선언할 또 다른 동교동계 인사들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요신문>은 박 후보 측이 친노계로 분류되는 정치권 인사와도 접촉한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8월 초 한 친박 의원은 참여정부 시절 고위직을 지낸 전직 관료와 386 출신 전직 의원을 잇달아 접촉하며 대선캠프 참여 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금까지의 박 후보와 친노 간 관계, 또 향후 대선에서의 경쟁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이러한 만남이 정치권에 주는 ‘충격파’는 적지 않을 전망이다.
이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친박 관계자는 “긍정적인 대답을 듣진 못했다. 친노 인사로서는 박 후보 편에 선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일 것”이라면서 “혹시나 하면서도 친노에게까지 캠프 합류를 제안했다는 것은 그만큼 박 후보 대권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5년 전 묻어둔 ‘그것’에 관심집중
지난 2007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측은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정수장학회 의혹을 집중 공격해 쏠쏠한 재미를 봤다. 5년이 지난 지금 정수장학회는 여전히 박 후보의 최대 아킬레스 건 중 하나다. 박 후보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손을 뗀 상황이다. 문제가 있었으면 지난 정권에서 내버려 뒀겠느냐”며 여러 차례 반박했지만 야권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강탈한 장물”이라며 공세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현재 서울시교육청이 정수장학회에 대한 감사를 진행 중인데, 그 결과에 따라 대선 정국이 요동을 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사실 정수장학회는 지난 참여정부 당시 두 차례나 조사를 받은 바 있다. 2005년 7월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정수장학회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고, 2007년 6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정수장학회에 재산을 헌납한 김지태 씨 명예 회복과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원상회복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가가 손해를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김지태 씨 유족은 2010년 6월 정수장학회 주식 반환 소송을 냈으나 지난 2월 24일 1심에서 패소했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정치권에선 박 후보와 겨룰 야권 후보가 정해지면 친노 측이 정수장학회 문제를 본격 제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의혹들이 새롭게 드러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특히 참여 정부 시절 사정기관들이 수집한 주요 정보를 관리하는 민정수석과 비서실장 등을 맡았던 문재인 후보 측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참여정부가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사안이었던 만큼 정수장학회 X파일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 후보 캠프에 있는 한 참여정부 전직 인사가 예전부터 확보해 놓고 있는 정수장학회 의혹에 대해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박 후보 네거티브 대응팀도 이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교체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금까지 박 후보는 “제가 지금 이사장도 아니고 (최필립 이사장에게) 아는 사이니깐 ‘물러나시오’라고 해야 하나”라는 입장이었다. 박근혜 캠프 관계자는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새롭게 불거질 것은 없다. 다 옛날에 나왔던 얘기 아니냐”면서도 “다만 2007년 박근혜 후보가 대선에 나올 경우 터트리기 위해 친노가 파일들을 비축해놨었다는 얘기가 들려 경계심은 늦추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