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강 중국을 준결승에서 만나지 않게 된 한국은 1990년 베이징 대회 이후 33년 만의 첫 단체전 결승 진출을 노렸다. 세계 8위로 한국 선수 중 랭킹이 가장 높은 신유빈이 이날 1단식과 4단식 주자로 나서 승부의 흐름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1단식에서 자신과 세계 랭킹이 비슷한 하야타 히나(9위)에게 0-3으로 완패했다. 4단식에서는 히라노 미우(16위)와 맞붙어 역시 1-3으로 졌다. 특히 4세트에선 0-6까지 끌려가다 8-8로 따라잡고도 막판 뒷심이 떨어져 승기를 내줬다.
신유빈은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언니들 도움으로 첫 메달을 함께 딸 수 있어서 감사하다"면서도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게 항상 내 뜻대로 되진 않는 것 같다. 문제점을 점검하고 보완해서 남은 경기를 치러야 할 것 같다"며 울먹였다.
신유빈의 눈물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자 복식에 함께 출전한 '띠동갑' 언니 전지희(31·미래에셋증권)는 "에이스는 누구에게나 너무 무겁고 큰 자리다. 우리 중 다른 누가 그 역할을 맡아도 유빈이만큼은 못할 거다. 유빈이는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신유빈도 주변의 격려 속에 곧 특유의 기합을 되찾았다.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다시 탁구채를 쥐었다.
신유빈이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임종훈(26·한국거래소)과 짝을 이룬 혼합복식 준결승에서 세계선수권 챔피언인 중국의 왕추친-쑨잉사 조에게 0-4로 졌다. 두 번째 동메달이었다. 홀로 출전한 여자 단식에서도 준결승에서 쑨잉사(중국)에 0-4로 완패했다. 세 번째 동메달이었다. 세계 1위이자 중국의 에이스인 쑨잉사는 여자 탁구의 '보스'로 불린다. 신유빈과 여섯 번 만나 여섯 번 모두 이겼다. 만리장성의 높은 벽을 두 번 연속 실감했지만, 신유빈은 울지 않았다. "이제 동메달이 세 개라 한 번은 메달색을 바꿔 보고 싶다"는 농담으로 재치 있게 넘겼다.
신유빈은 결국 전지희와 함께 출전한 여자 복식에서 메달 색을 금빛으로 바꿨다. 준결승에서 일본의 하리모토 미와-기하라 미유 조를 4-1로 꺾고 2022년 부산 대회의 석은미-이은실 조 이후 21년 만에 아시안게임 여자 복식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선 북한의 차수영-박수경 조와 33년 만에 아시안게임 결승 남북 대결을 펼쳤다. 신유빈과 전지희가 4-1로 이겨 아시아 정상에 섰다. 한국 탁구가 21년 만에 따낸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신유빈은 그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전지희와 함께 미리 준비한 '하트 세리머니'를 펼쳤다. 시상대 옆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던 북한 선수들에게 "같이 사진 찍자"며 먼저 손짓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태극기를 흔들다 말고 잠시 멈춰 유심히 살펴보더니, "좌우 문양이 바뀌었다"며 고쳐들기도 했다.

신유빈은 이번 대회에서 전지희라는 최고의 파트너와 함께 최고의 성과를 냈다. 중국계인 전지희는 중국에서 탁구를 하다 2008년 한국으로 와 2011년 귀화했다. 그 후 10년 넘게 한국 탁구의 에이스로 활약하다 이번 대회에서 12세 어린 후배 신유빈과 함께 첫 종합대회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 사실을 아는 중국 관중은 전지희가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 선수와 경기할 때는 자국 선수처럼 우렁찬 응원을 보내곤 했다. 전지희는 "중국에서 탁구를 할 때는 내 수준이 떨어져 더 높은 자리에 못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이 다시 탁구 인생의 기회를 주셔서 제2의 인생을 출발할 수 있었다"며 울컥했다.
그런 전지희를 지켜보던 신유빈은 "언니는 실력이 정말 탄탄한 선수다. 복식 경기를 함께할 때 기술적으로 믿음을 주고, 내가 자신 있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존재"라고 신뢰와 감사를 보냈다. 전지희도 "정말 행복하고, 유빈이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고맙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다"고 화답했다.
신유빈은 이제 파리 올림픽을 향해 나아간다. "아직 파리 올림픽 국가대표가 결정되진 않았지만, 내가 출전한다면 지금처럼 늘 하던 대로 연습을 착실히 해서 후회 없는 경기를 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전지희도 "유빈이 실력이 많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에 파리 올림픽 메달 도전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계 랭킹을 더 올리고 부상 관리를 잘해서 유빈이와 한 번 더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고 싶다"고 했다.
신유빈은 첫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고 항저우를 떠나면서 뜻밖의 신체 비밀(?)도 하나 공개했다. "성장이 멈춘 줄 알았는데, 키(1m69㎝)가 아직 자라고 있다. 키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 같다"고 했다. 파리 올림픽에선 키도, 실력도, 멘털도 더 자란 '삐약이'를 보게 될 수 있다.
중국 항저우=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