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8월 16일 134만 5000원으로 최근 3개월 최고점을 찍은 뒤 24일까지 127만 원대까지 내리막을 걸었다. 23일까지는 국내 기관과 외국인들이 모두 매도세였는데, 24일 국내 기관만 매수로 태도를 바꾼다. 이날은 서울지방법원이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소송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준 것이 국내 기관의 매수전환 이유다.
그런데 곧이어 미국에서 예상 밖의 삼성전자 완패 평결이 나오면서, 27일 시장에서 국내 기관들은 대규모 실망 매물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동안 줄곧 매도세를 보였던 외국인들은 국내 기관이 내놓은 물량을 싼 값에 쓸어 담았다. 이날 삼성전자 시가총액은 무려 14조 원이나 증발했지만, 덕분에 외국인들은 전일보다 무려 7% 싼 값에 주식을 살 수 있었다.
익명의 증권사 트레이딩 룸 관계자는 “국내 기관들은 국내 법원에서 삼성전자가 이긴 만큼 미국에서도 최소한 크게 불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외국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27일 삼성전자 주가가 폭락하자 외국인들은 주가하락에 따라 공매도했던 주식을 싸게 사려는 ‘쇼트커버링(Short Covering)’과 함께 저가매수에 나선 듯 보인다”고 전했다.
27일 오후에는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한국 정부신용등급 상향 발표도 있었다. 우리 정부조차도 ‘깜짝 놀랐다’는 반응을 내놨는데, 외국인들은 7월 말부터 일찌감치 국내 주식을 사들였던 점이 눈길을 끈다. 외국인 매수가 시작된 시점은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다드앤푸어스(S&P)가 삼성전자 신용등급 전망은 높이고, 경쟁사 등급은 깎는다는 결정을 발표하기 불과 보름여 전이다. 삼성전자 등급전망 상향 직후 삼성전자 주식은 팔기 시작했지만, 나머지 한국 주식에 대한 매수세는 무디스의 국가신용등급 상향 발표까지 이어졌다.
외국인들의 채권매매에서도 이들이 미리 낌새를 눈치 챘던 정황이 포착된다. 국채선물시장에서 외국인들은 지난 7월부터 줄곧 순매도 포지션이었는데, 8월 하순 들어 매수 포지션이 강해지면서 소폭 순매수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3%에 육박했던 국고채 3년 금리도 하락해 신용등급 상향이 발표된 27일에는 2.81%까지 하락한다.
한 자산운용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투자에서 정보는 생명인데, 이 점에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정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며 “이들은 미국 등 주요국 정부 최고 핵심 관계자들은 물론 민간기업의 주요 경영진까지 학맥, 인맥, 지연, 혼맥, 금맥 등으로 얽혀있다. 소송 결과가 나오기 전, 그리고 신용등급 발표 전 결과를 어느 정도 확신하고 투자 포지션을 가져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도 “전세계에 조직을 둔 글로벌 투자은행(IB)의 경우 각 시장에서 얻은 정보가 본사 차원에서 모두 취합되며 각국 지사나 지점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얻은 정보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서 “특히 한국 주요 수출 기업들의 경우 해외 실적이 중요한데, 글로벌 IB들은 해외 각국에서의 한국 수출업체 판매현황과 글로벌 경쟁사들의 동향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계들은 여기에다 막강한 자금력과 국내시장 영향력을 바탕으로 국내 고급정보 시장에서도 절대적 우위에 있다. 당장 청와대나 정부부처에서 주요 경제정책을 결정할 때 조언을 구하는 전문가들은 대부분 외국계 임직원들이다. 외국인들의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 때문인데, 결국 이들이 주요 정책정보를 다른 국내 기관보다 먼저 접하는 셈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증권사 서울지점의 임원이 정부에 조언을 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얻으면 이를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한다. 그러면 해외계열사 창구에서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투자에 나선다. 국내 기관보다 분명 유리한 입장”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이나 기획재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경우에도 주로 외국계 은행 지점 창구를 이용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러다 보니 시장의 의혹을 사는 경우도 있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주로 국내 대형 법무법인(로펌)을 통해 경영 관련 도움을 얻는데, 주요 로펌에는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고위공직자 출신 고문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은 ‘전관(前官) 네트워크’를 활용해 외국계 금융기관과 정부 당국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고위관료 자녀들의 특혜성 취업 관련 의혹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고위 관료들 자제를 보면 외국계 증권사에서 인턴십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며 “외국계 증권사 인턴십은 취업에 도움이 크게 되기 때문에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리는데, 유독 고위 관료 출신 부모를 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인턴을 매개로 외국계와 관료 간 밀월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처럼 외국인의 가공할 만한 정보력에는 막강한 자금력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호화 접대’는 마치 후진국성 관행인 듯 여겨지지만, 외국계 회사들은 수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막대한 접대를 지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국내 기업들은 50만 원 접대비 상한제에 신경을 쓰지만, 외국계들은 별 구애를 받지 않는다. 비용을 더 쓰더라도 그 이상을 벌 수 있다면 돈을 아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며 “차라리 국내 금융기관들의 접대 규모는 새 발의 피 수준이다. 특히 외국계 회사에는 이중국적이나 외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은데, 이들은 한국 국적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금을 덜 내기 때문에 비용보다는 성과에 좀 더 공격적으로 투자할 여지가 크다”고 털어놨다.
국내 대기업들도 외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정보제공에 관대하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국내 대기업들과 거래 관계가 많지 않다. 국내 대기업 자금을 유치하거나 거래를 트기 위해 철저히 ‘을(乙)’이어야 하는 국내 금융기관과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 외국계 증권사들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갖다 보니 외국계 증권사들이 탐방할 때도 대기업들은 굉장히 협조적이다. 탐방도 해당 기업과의 거래관계를 고려해 조심해야 하는 국내 증권사들과 얻어내는 정보의 질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