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홍석현 전 대사, 이학수 부회장, 이재용 상무, 이건희 회장 | ||
검찰 내부에 밝은 한 인사는 “검찰이 지난해 안기부 도청 문건 사건으로 이미 소환된 바 있는 홍석현 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 부회장을 먼저 소환해 궁극적 목표물인 이건희-이재용 부자에 대한 압박을 가할 것”이라 전망하기도 했다. 삼성의 전·현직 사장들이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나서 진행돼 온 항소심 과정에서 검찰은 “이건희 부자가 개입한 정황을 잡았다”고 밝히는 등 자신감을 보여 왔다. 그런데 수사당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소환에 불응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처남인 홍 전 대사는 검찰이 주요 진술 획득과 정황 포착을 위해 삼성 핵심 4인방 중 제일 먼저 소환하려던 인물이었다.
검찰은 ‘핵심 4인방이 소환에 불응하면 강경대응한다’는 입장을 흘리면서 삼성 측을 압박해 왔다. 홍 전 대사 측과는 소환시기를 조율해 디데이를 7월 27일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홍 전 대사의 소환 불응이 뜻밖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홍 전 대사 같은 거물급 인사들이 검찰의 소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사례는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수사당국의 전방위 압박에 삼성 측이 수세적 입장을 취해온 점을 생각하면 예상밖이다. 이런 까닭에 ‘삼성 측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우선 8월 중으로 예정된 검찰·법조 조직 대규모 인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수사당국은 삼성 핵심 4인방에 대한 수사를 조만간 완료해 8월 말까지 에버랜드 사건 수사를 마무리할 것이라 밝혀왔다. 이는 검찰과 사법부의 대규모 인사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대규모 인사 직전 대형사건 처리를 마무리해 대폭 인사에 걸림돌이 없게 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올 초부터 정·관·재계를 달궜던 김재록 게이트 수사는 결국 김재록 씨와 몇몇 관련자들만이 처벌받는 것으로 사실상 마무리됐다. 수사과정에서 온갖 설이 난무했던 현대차 비자금 용처와 이헌재 사단에 대한 구설수 등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있다. 장기수사하기 쉽지 않는 대상이라는 점도 있지만 8월 인사를 염두에 둔 수사종결로 해석되기도 한다. 결국 ‘검찰이 8월 안에 대형사건 수사를 마무리해야한다’는 전제 하에 삼성 핵심 4인방이 ‘버티기’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삼성이 검찰보다 법원에 대해 ‘더 자신감을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사는 검찰이 하지만 최종판결은 재판부가 내리는 까닭에서 삼성이 법원조직에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전언이다. 얼마 전 에버랜드 사건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5부)가 1심 판결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며 검찰 측에 “에버랜드 전환사채 실권 결정 과정을 명확히 해달라”고 한 점 또한 삼성의 자신감을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검찰 측에 ‘이건희-이재용 부자를 처벌하려면 더 확실한 정황을 제시하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최근 삼성이 법무라인 강화를 추진하며 주 영입대상을 부장판사 출신 인사들에 맞췄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일각에선 삼성이 법원 내 유력인사들에 대한 영입제의나 회유 등을 통해 상당한 우군세력을 확보했다는 소문마저 들려온다.
한 법조인사는 “홍석현 전 대사가 민감한 시기에 검찰 소환에 불응한 ‘자신감’의 배경을 그의 법조인맥을 통해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에버랜드 사건 항소심이 진행 중인 서울고등법원(서울고법) 소속 부장판사들 중엔 홍 전 대사와 인연을 가진 인사들이 제법 많다. 홍 전 대사는 1949년생으로 1968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대에 입학했다.
현재 서울고법에 소속된 부장판사들 중 경기고-서울대 출신인사들은 9명에 이른다. 이들 모두 홍 전 대사의 경기고-서울대 직속후배가 된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해 홍 전 대사가 안기부 도청 사건으로 소환될 당시 조사과정에 대한 자문을 해준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고법 요직을 거쳐 올 6월 대법관직에 오른 인사들 중 2명이 홍 전 대사의 경기고-서울대 직속후배라는 점도 눈에 띈다. 단순히 학연 때문에 이들을 홍 전 대사와 ‘특별한 관계’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엑스 파일’ 사건을 통해 삼성이 ‘대 법조계’ 로비 방법으로 학연을 요긴하게 활용해온 것이 공개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이건희 회장 아들인 이재용 상무와 같이 경복고-서울대 출신인 부장판사가 서울고법에 2명이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에버랜드 사건 항소심 재판장인 이상훈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광주제일고 출신으로 삼성 핵심 4인방과 선후배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법원 조직 내에서 눈에 띄는 광주제일고 인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들려온다. 서울고법의 수장인 박송하 서울고등법원장이 광주제일고 출신으로 이 부장판사의 고교 선배가 된다. 이용훈 대법원장 또한 광주제일고 출신이라 대법원장-서울고등법원장-에버랜드 담당 판사가 모두 광주제일고 동문이 된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에버랜드 1심 재판 당시 삼성 임원의 변론을 맡았던 전력이 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당시 회삿돈 286억 원을 횡령한 두산그룹 박용만-박용성 총수 형제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예로 들어 ‘재벌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비판했던 바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항소심 결과 또한 집행유예로 나오면서 ‘재벌에 대한 법원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비판론도 제기됐다.
그렇다면 삼성의 ‘믿는 구석’이 과연 검찰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 수 있을까. 한 검찰 관계자는 “에버랜드 사건처럼 여론의 관심이 큰 사건의 담당 검사나 재판장이 사건종결이 되기도 전에 교체될지는 의문이지만 정기인사철에 특정 사건을 담당하던 검사나 재판장이 교체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밝힌다. 법조타운 일각에 나도는 ‘에버랜드 사건 항소심 재판부가 교체될 것이란 소문’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에버랜드 건과 같은 대형재판에 대한 종결이 재판부 인사이동 등의 변수로 인해 2~3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까닭에 에버랜드 수사와 재판과정이 다음 정권으로 연장될 수도 있다는 섣부른 관측마저 제기된다. 그러나 검찰의 한 인사는 “에버랜드 항소심 재판부가 1심 판결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한 것에 대해 검찰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검찰이 빠른 시일 내에 재판부에 추가 물증을 제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 전망했다.
얼마 전 삼성은 사실상 그룹 소유였던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의 소유·운영권을 교육부에 넘겼고 홍창선(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이사장과 이재용 상무 등 재단의 등기이사진에 올라있던 삼성 측 인사들을 전원 철수시킨다고 발표했다. 사회환원 약속 이행을 통해 여론의 면죄부 또한 얻어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약속한 사안의 절차를 길게 끌면서 한 단계 ‘버전업’될 때마다 화제몰이를 하려는 것이 삼성의 또 다른 ‘믿는 구석’이란 비판론도 제기된다. 등기이사 철수를 발표했지만 아직 등기부에 이재용 상무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등기부에서도 이름을 뺐다’는 식의 추후 발표를 통해 ‘재탕’효과를 보겠다는 속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