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6월 30일 여의도 5·16광장에서 베풀어진 카터 미대통령 방한 환영식. 박 대통령과 카터 대통령이 나란히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
▲ 이승만 전 대통령. |
이러한 우월감은 강한 카리스마를 동반한 그의 면모와 연결된다. 겉으로 봐서는 잘생긴 귀공자였지만 그는 젊어서부터 배짱이 두둑했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모진 고문으로 반죽음 상태까지 간 이승만은 사망으로 착각한 간수들에 의해 밖에 내다버려진 일이 있었다. 다행히 행인에 의해 목숨을 부지한 그는 협회 활동을 방해하고 시위를 진압했던 황국협회 간부들에게 달려 들어가 대 놓고 공격을 가하는 대담성을 보여 준 일화가 있다.
맥아더 장군의 주선으로 당시 적국이었던 일본 수상과 면담한 자리에서도 그는 거침없었다. 일본 수상이 미개발국인 한국을 비하할 목적으로 “조선에는 아직도 호랑이가 많죠?”라고 하자 이승만은 이를 간파하고 “아! 한국에는 그동안 호랑이가 많았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 장군이 모두 잡아먹어서 씨가 말랐다”고 응수했다. 일본의 야만성을 넌지시 암시했던 것. 얼굴이 붉어진 일본 수상은 당황해하며 귓속말로 “이승만 같은 자가 한국에 2~3명만 더 있었다면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이승만의 퍼스낼리티는 정작 국정운영에서 ‘독선’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이승만은 야당의 비판기사가 실려 있는 국내신문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 영부인 프란체스카는 그에게 미국 신문만 대령했다는 후문이다. 독선적 성격 탓에 자신에 대한 쓴소리는 용납하지 않았고 아예 관심도 없었다. 훗날 그가 ‘내치에는 등신’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는 이유다.
이승만의 국정운영은 실로 원맨쇼나 다를 바 없었다. 직접 정책결정에 참여하지 않을 때도 장관에 권한을 위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정책결정도 허락지 않았다. 심각한 외교 사안은 물론 개인여권 발급이나 사소한 원자재 수입계약까지 직접 개입했으며 국정연설 원고도 직접 타이핑했다. 국무회의에서는 장관들이 정책현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이 준비한 메모를 토대로 돌아가며 ‘칭송’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독선적 행보는 결국 본인 스스로를 아첨꾼들로만 구성된 ‘인의 장막’에 갇히게 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에서 비롯된 정치파동과 1960년 4·19사태는 결국 이승만 특유의 왕족 퍼스낼리티에서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 하면 한국에서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구순까지 살다간 그는 워낙 건강 체질이었다. 한번은 강원도 원주에 급히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기상이 워낙 안 좋아 비행기가 뜨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승만은 그때 그냥 떠나자고 부추겼다. 결국 여의도에서 비행기가 떴고 예상대로 기내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젊은 수행원들은 구토를 연발하며 초죽음 상태까지 갔다. 하지만 그때도 이승만은 끄떡없었다. 착륙하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내려오더니 “자네들 괜찮아”라고 오히려 수행원들의 안부를 되물을 정도였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독특한 습관도 있었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맨손체조를 즐겼던 것도 있었지만 정작 그의 가장 큰 건강유지 비법은 ‘장작패기’였다. 그는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할 때면 평소 준비한 장작을 패곤 했다. 그는 고령이 되어서도 이 장작패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권력욕은 절제를 몰랐지만 물욕은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와이로 망명한 뒤 이승만은 빈털터리였다고 한다. 교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평소 부인 프란체스카를 ‘마미’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부인이 장을 보는 날이면 “장보러 가지 말아, 마미. 서울로 돌아가려면 돈이 있어야 돼. 꼭 가려면 조금만 사와”라며 절약을 강조했다고 한다.
병으로 쇠약해져 노인병원으로 들어갔을 때도 그는 자신이 교포들로부터 빌린 물건들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었다.
# 가난의 퍼스낼리티 박정희
▲ 박정희 전 대통령. 보도사진연감 |
박정희가 군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도 그가 타고난 군인체질이라는 점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경제적 이유가 더 컸다.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는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갔지만 박봉에 시달리던 그는 그나마 장래가 보장되는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당시 입대를 위해 호적을 고쳐 나이를 속이고 혈서까지 썼다.
박정희가 다른 무엇보다 ‘경제건설’에 매달렸던 것도 다 그의 퍼스낼리티에서 기인했다 볼 수 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국가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무엇인가. 먼저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립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다. 이것만 해결되면 통일, 부패, 노동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국정철학’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의 절대적 목표는 어려서부터도 그랬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현실적이었다. 당장의 굴욕쯤은 나중을 위해서 꾹 참을 줄 알았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 전력 탓에 군에서 진급이 더뎠다. 준장 시절, 그는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군단장 백인엽이 철모를 탁탁 칠 때도 일체의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평생 동안 ‘실력을 비축한 다음에 행동한다. 실력을 준비하기 전에는 어떤 수모도 참아야 한다’는 현실적 사고관을 행동 원리로 삼았다.
박정희가 1964년 굴욕외교라는 논란 속에 한일국교를 정상화시키고 유·무상 6억 달러 청구권 자금을 받아온 것도 이러한 현실적 사고관에서 기인한다. 눈앞의 민족감정만 앞세우기보다는 일본이 미국에게 그랬듯, 훗날을 위해서 머리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박정희의 현실적 사고관 안에는 철저한 계산과 준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처럼 독단적이었지만 보다 세심하고 신중했다. ‘내치에는 등신’이라는 말을 들었던 이승만과 달리 그는 각 부처의 세부사항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견해를 갖고 있었고 언제나 각료들을 긴장시켰다. 의사결정 초기에는 주변의 말도 잘 참고했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 물불 안 가리고 밀어붙였다. 훗날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리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주당이기도 했다. 1966년 태국 국왕 초청으로 태국에 방문한 일이 있었다. 당시 태국은 동남아 외교의 중심지였다. 그 때 박정희는 드럼통 주량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외교 리셉션장에서는 보통 입술만 살짝 적시고 받은 술잔을 내려놓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는 술잔이 오는 대로 입에 연거푸 털어 넣다. 오죽했으면 육영수 여사는 물론 상대국 외교부 장관까지 자중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셉션장에서 술에 취해 쓰러지는 외교적 결례를 우려했던 것. 하지만 박정희는 보란 듯이 단상에 올라가 또박또박 연설을 하고 다시 내려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박정희는 독단적이었던 면모가 있었던 반면, 눈물이 많기도 했다.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을 당시 박정희는 연설을 하기 위해 강단에 올랐다. 그 때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박정희가 선창을 시작했다. 그리고 간호원들이 합창으로 화답했는데 점점 목이 메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애국가의 마지막 소절이 끝날 때쯤, 강당은 눈물바다가 됐다. 1970년대, 박정희가 경남 마 산의 한일합섬 시찰 당시 이야기도 유명하다. 당시 박정희는 한 여공에게 소원을 물었다. 그리고 여공은 “나도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때 박정희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물을 흘렸고 그렇게 탄생한 학교가 대한민국 1호 야간 실업학교로 유명한 한일여자실업고였다.
눈물 많은 사나이 박정희는 ‘사랑’ 앞에서도 약한 남자였다. 그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성이 존재했다. 이대여대생인 이현란이었다. 당시 그는 이미 첫 번째 장가를 들어 맏딸 박재옥이 열한 살이나 되던 시기였다. 이현란을 무척 사랑한 박정희는 그와 동거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박정희가 당시 좌익사건에 연루되자 이현란은 떠나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내가 체포될 것이라고 후배가 알려주어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당신을 사랑하기에 떠날 수 없었소”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훗날 결별하고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박정희는 옛 연인 이현란을 잊지 못해 비서를 시켜 평범한 가정을 이뤄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녀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는 옛 연인 이현란뿐 아니라 재혼한 본처 육영수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육영수가 피살되고 치러진 장례식에서 박정희는 문상객 앞에서 한 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깊어 문상객들의 발길이 뜸해지면 영정을 붙잡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 울음소리가 실로 맹수를 연상케 했다고 한다.
육영수가 죽고 한참 뒤에도 박정희는 “지금도 그 사람이 두 손을 내밀며 저 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이 손 좀 잡아 봐요. 나병환자들과 악수한 손이에요’라고 웃으면서 말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육영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94년 7월 6일 만나 술 한잔을 하며 회포를 푼 뒤 그간에 쌓인 앙금을 씻은 듯 어깨동무를 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하지만 전두환이 성공 가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처세술과 의리였다. 그는 한마디로 ‘인기남’이었다. 육사 재학시절 학업실력이 부족해 ‘둔재’로 통하던 그였지만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후배들로 넘쳐났다.
그를 두고 혹자는 ‘베품의 철학이 많은 사람’으로 칭한다. 그는 부하나 후배를 위해 입던 옷을 벗어주는 것은 기본이고 100원이 생기면 70원은 후배들을 위해 썼다. 후배들을 위해서는 공사를 안 가리고 도와줬다. 오죽했으면 자신을 좋아하는 이혼녀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후배를 위해, 대신 그 이혼녀에게 가 ‘절교’를 전해줬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하나회는 처세와 의리라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12·12쿠데타 당시 하나회에서는 전두환 외에 어느 누구도 지도자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와 관계를 맺고 있던 후배와 동기들은 그의 확고한 영향력을 인정했다.
많은 후배들이 그를 진심으로 따랐고 한편으론 두려워했다. 전두환이 군내 후배들을 음식점으로 소집하면 그가 오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먼저 음식에 손댈 수 없었다.
특히 그러한 후배들 중 장세동은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5공화국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뒤 줄곧 청문회와 구속 수감 등 시련을 맞았다. 전두환에 대한 원망도 있을 법하지만 장세동은 그때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말로만 일관했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오면 꼭 전두환을 찾아가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물론 전두환 본인도 선배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지 않았다. 군내에서 그를 가장 아꼈던 선배는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1961년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를 처음 접한 전두환은 쿠데타에 동조한 뒤 줄곧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왔다.
심지어 그는 박정희의 양아들이란 얘기까지 들었다. 열 살이 넘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정희 앞에서 넉살 좋게 행동했다. 박정희는 권투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를 불렀다고 한다. 전두환은 그때마다 해설위원 뺨치는 구수한 입담으로 권투해설을 들려주곤 했다.
전두환의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의리는 대통령직에 오르고 나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기가 쓴 사람은 끝까지 챙기고 어쩔 수 없이 내보내야 할 경우는 거금을 챙겨주는 습관이 있었다. 소심했던 친구 노태우가 말하는 ‘한 장’과 전두환이 말하는 ‘한 장’은 그 액수에서 차원이 달랐다. 5공 경제 치적의 발판을 마련해준 김재익 경제수석은 허삼수와 허화평 등 내부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고 밀어붙인 카드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꿈과 힘의 결합’으로 표현했다.
전두환은 가난한 빈농 출신에 머리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선후배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뛰어난 처세술과 의리가 있는 사나이였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 한줌의 의리 하나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5공’이라는 독재정권을 탄생시킨 또 하나의 독재자에 불과했다.
전두환은 사람은 좋아했지만 의외로 도박은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평소 친하게 지낸 동료나 후배라 하더라도 도박하는 것을 보면 상종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도박을 하다가도 전두환이 등장하면 얼른 도박판을 치우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말술로 통했던 박정희와 달리 그는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워낙 사람을 좋아해 술판에 자주 끼기는 했지만 그 때마다 술과 색깔이 비슷한 물이나 음료를 마셔가며 사람들의 눈을 속였다고 한다. 대통령 시절 새벽에 경호실장을 호출했는데 경호실장이 술을 마신 것을 알고 나중에 해임하는 일까지 있었다.
전두환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스포츠였다. 특히 축구를 좋아했는데 학창시절부터 그는 탁월한 골키퍼였다고 한다. 1983년 6월, 청소년축구팀이 멕시코 고원에서 세계 4강에 들었을 무렵 전두환은 당시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정주영 현대회장과 마주한 일이었다. 그 때 정 회장은 “지금 최순영 축구협회장이 멕시코 현지로 급히 갔다”라고 말을 건네자 전두환은 “그런 사람은 얼마나 좋겠는가.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고”라며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박종환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과의 인연도 흥미롭다. 당시 청소년 대표팀과의 만찬자리에서 전두환은 박 감독에게 “예전에 내가 공수단장으로 있을 때, 갓 창단한 서울시청 축구팀에게 2주 동안 극기훈련을 시켜 준 적이 있었다. 그 뒤 서울시청팀이 연승을 하더군”라고 하자 박 감독은 “각하, 그때 그 팀 감독이 저였습니다”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LA올림픽 기간에는 마음이 졸여 TV를 끄고 대신 비서관으로부터 메모를 받았다. 비서관이 승전보를 알리면 그는 해맑게 웃으며 “금메달 땄구나”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금메달이 무더기로 쏟아진 날에는 기쁨을 가눌 길이 없어 자식들을 앞에 두고 못 마시는 술잔까지 기울이며 축하했다고 한다.
# 그저 평범함 추구했던 노태우
사람들은 노태우를 두고 ‘물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맹물처럼 희멀겋고 싱겁고 다른 대통령과 비교해 카리스마와 개성도 부족하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그는 우리네 사람들과 가장 많이 닮은 소시민적 유형의 인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퍼스낼리티는 ‘평범함’의 극치였다. 굳이 튀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육사 동기생 전두환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적극적이고 활발했던 친구와는 달리 온순하고 소심한 편이었다. 사람을 몰고 다니던 전두환과는 달리 그 주변에는 후배들도 별로 없었다. 그의 위관시절 별명은 ‘아카징키(빨간약)’였다. 럭비부에서 달리기는 잘했지만 언제나 몸을 사려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또 점프훈련에서도 안전을 생각해 항상 철모 대신 더 단단한 헬기조종사용 파이버를 썼다고 한다.
그는 친구 전두환과는 평생 동안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군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친구를 묵묵히 따르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전두환이 거친 작전차장보, 육참총장 보안사령관, 공수부대 여단장 등 직위를 고스란히 후임으로 물려받았고 친구가 벌여 놓은 일을 묵묵히 수습해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이러한 행보를 두고 “전두환이 깨트려 놓은 사발을 노태우가 맞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노태우는 내심 전두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있었다. 전두환은 언제나 친구 노태우를 2인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권력을 제한했다. 그를 불러 크게 혼내는 일도 많았다. 노태우는 그때마다 홀로 한강을 찾아 울부짖거나 평소 자신의 취미였던 만화책을 넘겨보며 마음을 삭혔다고 한다. 한번은 전두환이 노태우의 우는 모습을 목격하고 노신영 총리 등이 있는 앞에서 “노태우, 너 한강에서 울었다며?”라고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 맞서기보다는 홀로 삭히며 갈등을 피하는 타입이었다.
전두환의 백담사 귀양으로 둘 사이는 멀어졌지만, 노태우의 소심한 성격 탓에 정작 싸움이 붙은 것은 영부인들이었다.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와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은 언니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냈다. 당연히 김옥숙이 이순자를 깍듯이 모시는 관계였다. 하지만 백담사 귀향 사건으로 영부인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갔고 1시간 넘게 전화로 설전을 벌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노태우는 일찍이 본인 스스로 앞장서 나갔다기보다는 철저한 2인자의 처세술을 통해 자기의 몫을 확보해 나가는 소시민적 지도자였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후배들에게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노태우는 전국구 초선으로 내정된 시기에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권 사무총장은 노태우의 육사 4년 후배였다. 하지만 권 사무총장은 당시 당 요직에 있었던 5공 거물급 인사였던 반면, 육사 선배 노태우는 정치초년병에 불과했다. 권 사무총장은 노태우를 방에서 맞이했지만 상석을 내주기는커녕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면전에서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등 무시로 일관했다. 노태우의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변했고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국정운영에 있어서도 그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아마도 노태우만큼 비서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대외행사에서 준비된 원고가 아니면 발언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행사를 앞두고는 밤을 지새우며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때문에 즉석연설은 거의 없었고 그의 연설은 항상 부자연스러웠다. 이러한 조심성 있는 성격 탓에 그는 말과 관련된 구설수는 없는 편이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