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회장의 인사스타일은 재계에서 ‘깜짝인사’ ‘럭비공인사’라는 말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집무실이 있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그룹 사옥 21층. 이곳에서 최근 현대차 임원들을 향한 칼바람이 불고 있다.
9월에만 전무 2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몽구 회장은 지난 8월 말 미국 조지아의 기아차공장을 방문하고 난 직후 조지아공장장이던 김근식 전무를 불러들이고 신현종 구매본부장을 새로운 조지아공장장에 앉혔다. 이어 9월 중순에는 상용차수출사업부장이었던 민왕식 전무를 내리고 해비치호텔앤리조트 대표였던 정영훈 부사장을 그 자리에 올렸다. 김 전 공장장은 현재 별도의 직책 없이 인사를 기다리는 중이고 민 전 전무는 퇴사했다. 현대차 측은 “김 전무에게는 조만간 다른 역할을 맡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정몽구 회장의 갑작스러운 인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른 재벌이었다면 이 같은 ‘깜짝인사’가 크게 회자될 법하지만 현대차에서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만큼 충격파가 많이 무뎌졌다. 인사 원칙과 방식, 시기 등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럭비공인사’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평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결과가 나쁘지 않다는 것이 현대차 측 주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수시인사가 잘못된 것이라면 지난 10년간 현대차가 이렇게 발전했겠느냐”며 “최근에는 다른 대기업에서도 수시인사가 잦아지고 있는 걸 보면 결코 잘못됐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 정의선 부회장. |
지난해 7월 미국 출장길에서 돌아온 정몽구 회장은 윤준모 당시 기아차 조지아공장장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고, 윤 부사장은 연말 사장단 인사에서 현대다이모스 대표로 옮겨갔다. 윤 대표의 경우 전자에 해당되는 셈. 반면 현대차의 주요 보직 중 하나인 기아차 조지아공장장에서 불과 9개월 만에 물러난 김근식 전무의 역할은 현재 미정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정 회장 스타일로 볼 때 기아차의 최근 미국 실적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올 들어서 도요타, 혼다 등 일본업체의 반격과 미국의 ‘빅3’인 GM, 포드, 크라이슬러의 회복세로 북미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현대·기아차의 실적은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지난 7월까지 미국시장 누적 판매 성장률은 12%로 도요타 28%, 혼다 20%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또 미국시장 점유율에서도 현대·기아차는 지난 8월 8.6%를 기록, 9.3%를 기록한 전년보다 오히려 0.7%포인트(p) 하락했다. 도요타가 전년보다 2.6%p 오른 14.7%를, 혼다가 전년보다 2.5%p 상승한 10.2%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심상치 않은 결과다. 점유율만 보면 현대·기아차는 혼다에 역전당한 것. 이 같은 결과가 조지아공장장의 교체로 이어졌다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 기아차 조지아공장 연수원. |
일각에서는 최근 일련의 인사를 현대차 후계체제와 연결하기도 한다. 75세라는 정 회장의 나이를 감안하면 서서히 준비 작업에 돌입할 때도 됐다는 것. 공교롭게도 이 같은 관측은 지난 2월 이정대 현대모비스 부회장이 취임 10일 만에 사임한 사실과 오버랩되면서 정의선 부회장 체제를 위한 초석을 다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사임한 이 전 부회장은 대표적인 정 회장의 측근 중 한 명으로 통한다.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 당시 재경본부장(부사장)을 맡으며 정몽구 회장의 고난의 시기를 함께했다. 한때 ‘정몽구의 남자’로 불리며 삼성 이학수 고문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런 이 부회장이 취임 10일 만에 사임했으니 정 회장이 아들 정의선 부회장을 위해 ‘가지치기에 나섰다’는 얘기가 나올 법도 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중국 사업을 총괄하는 설영흠 그룹 부회장에 대한 인사 소문마저 오가고 있는 터다. 설 부회장 역시 정 회장의 핵심 측근 중 한 명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며 현대차그룹에서 가장 장수한 임원 중 한 명이다. 그러나 현대차 측은 “오히려 출근시간이 새벽 6시 전으로 빨라질 정도로 정 회장은 여전히 왕성한 체력을 자랑한다”며 “현재 오가는 후계체제 이야기는 억측에 불과하다”고 부인했다.
정 회장의 ‘수시인사’, ‘깜짝인사’는 지난 2008년 이후만 해도 20차례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인사방식에 대해 비판 일색이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7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에 성공한 후 귀국하는 자리에서 “인사는 수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비롯해 10대 그룹 내에서도 이따금 수시로 인사하는 빈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발전상을 볼 때 수시인사의 긍정적 효과는 있는 것 같다”며 “그러나 너무 잦은 깜짝인사는 임직원들에게 허탈감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