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 전 대통령(오른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오랜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우리가 소위 말하는 ‘민주화가 완성된 국가’의 기준을 충족시킨 건 정확히 2012년 올해다. 사실상 군사정권 말미였던 노태우 정권 이후 1993년 ‘문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김영삼 정권이 그 시초라 하겠다. <일요신문>은 지난호에 이어 안동대 김병문 교수의 저서 <그들이 한국의 대통령이다>를 토대로 역대 대통령들의 흥미로운 일화를 따라가 본다. 이번 주는 민주화 이후 등장한 ‘영남의 기수’ 김영삼부터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까지 그 숨겨진 퍼스낼리티의 궤적을 쫓아가 봤다.
# 낙관주의자 김영삼
김영삼의 등장은 한국 정치사에서 무척 큰 의미를 갖는다. 그는 신군부세력 몰락 이후 민주적 선거절차를 통해 대통령직에 오른 사실상 최초의 인물이다. 라이벌 김대중이 ‘호남의 기수’라면 김영삼은 단연 ‘영남의 기수’다. 그는 비록 지적인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특유의 ‘감’과 ‘촉’이 있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감각의 근원에는 타고난 낙관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경남 거제에서 멸치어장으로 큰 부를 쌓은 유복한 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라 할 수 있는 낙관주의의 근본에는 언제나 ‘든든한 백’으로 작용했던 유복한 가정환경과도 무관치 않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쌓아놓은 부는 그가 오랜 독재 치하에서도 꿋꿋이 버텨 나갈 수 있게 한 버팀목이었다.
그는 부잣집이라는 ‘든든한 백’ 덕분인지 어려서부터 무척 당돌했다. 통영중학교 재학시절부터 키는 작았지만 타고난 씨름꾼인 데다 장거리 수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그가 만난 일본인 교장과의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대목이다.
입만 열면 한국인에 대한 욕과 멸시를 일삼았던 당시 일본인 교장은 아이들이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를 싸오면 빼앗아서 내던졌다고 한다. 반일감정이 깊었던 소년 김영삼은 이 일본인 교장이 전근 갈 때 이삿짐 속의 곡식 자루에서 곡식을 다 빼내고 대신 흙과 돌을 채워 넣는 복수를 감행했다.
당시 일이 발각되어 그는 무기정학까지 당했다. 이 밖에도 그는 한국 학생을 멸시하던 일본인 반장을 흠씬 두들겨 패는가 하면 학교의 교육방침을 거스르고 줄곧 조선말을 썼다 혼나곤 했다. 이렇듯 김영삼의 권력에 대한 항거는 어려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그의 정치사적 궤적을 살펴보면 무모하다 할 만큼 낙관적이었다. 25세 때 국회에 입성한 김영삼은 젊은 시절부터 대담한 승부를 곧잘 걸었다. 라이벌 김대중의 선출로 결론 났지만 신민당시절,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이 내걸었던 ‘40대 기수론’은 당내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승부사’로서 그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의 낙관주의는 당시 선거과정을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김영삼은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경선에서 자신이 후보로 선출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당시 전당대회를 마치고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보 선출 축하를 위해 중국집에 요리를 주문해 놓고 맥주 수십 상자를 들여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이 읽을 대선 후보 취임사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대선후보로 라이벌인 김대중이 선출되자 준비한 음식과 맥주를 송두리째 치워버렸다는 씁쓸한 일화가 있다.
김영삼은 자신의 낙관주의 탓에 당내 경선과정에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긴 했지만 이러한 퍼스낼리티가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크게 작용했다. 훗날 지나친 권력욕으로 회자되기는 했지만 3당합당은 결국 그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던 하나의 ‘도박’이었다. 김영삼은 자신이 건 도박에 확신이 있었다.
그는 숱한 고역 끝에 불사조처럼 살아남는 법을 깨우쳤으며 나름의 감각이 있었다. 그의 측근들은 3당합당 당시 숱한 주변의 질타 탓에 가슴을 졸이며 걱정했지만 김영삼은 자신이 택한 도박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태연했다고 한다.
또한 김영삼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강인함과 건강함을 공개적으로 자랑하기 좋아했다. 라이벌 김대중이 병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 비교해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는 얘기도 많다.
한번은 대통령 취임 후 몇 달이 지나 아시안게임을 앞둔 국가대표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태릉선수촌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선수들과 함께 새벽 조깅을 했다고 한다. 400m 트랙을 도는 이 조깅에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포함해 체육회 임원진, 비서관, 보좌관 등 500명이 참가했다. 사람들은 5바퀴를 한계로 봤지만 김영삼은 지친 기색 없이 뛰었다. 결국 체육회 임원 일부와 여선수들, 그리고 중량급 남자선수들이 도중 포기했다. 김영삼은 시간이 갈수록 속도를 조절하기는커녕 보란 듯 스피드를 내더니 무려 12바퀴 반을 돈 다음에야 달리기를 멈췄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신감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비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1991년 김영삼은 정주영 국민당 대표의 희수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정주영과 인사를 나눈 뒤 곧장 헤드테이블에 앉았다고 한다. 희수연은 보통 가족행사이기 때문에 헤드테이블에는 가까운 친척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헤드테이블에 떡하니 앉는 바람에 다른 참석자가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이런 일은 빈번했다고 한다.
김영삼은 정치적 감각은 타고났지만 지적 능력은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그의 말실수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한번은 그가 구로의 한 초등학교에 방문했을 때 아이들 앞에서 ‘결식(缺食)아동’을 계속 ‘걸식(乞食)아동’으로 잘못 말해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었다. 또 제주도 방문 당시에는 제주도를 두고 계속 ‘거제도’라고 말했다가 정정한 적이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TV토론에 나서는 것을 주저할 정도로 논리적 언변 및 지적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난의 퍼스낼리티 김대중
인생사 힘들다지만 김대중만큼 힘겨운 ‘고난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는 언제나 마이너리티였으며 비주류의 삶을 걸어왔다. 단지 그가 다른 마이너리티와 차이가 있다면 언제나 공부했고 견뎠으며 기다릴 줄 알았고 용서할 줄 알았다는 것. 그의 퍼스낼리티를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고난’ 그리고 ‘비주류’라 할 수 있다.
우선 그의 태생 자체가 서출이었다.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의 외딴 섬, 하의도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 김운식의 소실인 장수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다정다감했지만 여느 소실 핏줄이 다 그랬듯 김대중은 아버지와 줄곧 떨어져 지냈다.
모친의 유별난 교육열로 목포상고에 진학하지만 그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줄곧 꿈꿔왔던 대학진학에 실패한다. 미 해군의 해상 봉쇄로 그가 염두에 두었던 일본 대학 진학이 어려워졌고 차선책으로 택한 만주 건국대 입학도 시대적 혼란 속에 좌절됐다. 그의 학력은 상고졸업으로 끝나게 된다. 대학입학 실패는 그에게 있어서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된다. 그의 ‘정규’에 대한 갈망과 마이너리티적 습성은 좌익계열 단체 투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정치입문과정 역시 불운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1954년 처음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으며 4대 총선 강원도 인제 지역구에서도 재차 낙선한다. 1961년 보궐선거를 통해 5대 국회에 들어서지만 당선증을 받고 이틀 후 5·16쿠데타가 일어나 당선 무효가 결정된다. 그리고 국회의사당은 밟지도 못하고 끝내 교도소로 직행하게 된다.
박정희와의 악연으로 시작된 김대중의 본격적인 고난사는 1973년 8월 납치사건으로 정점을 찍는다. 김대중은 일본 도쿄호텔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원에게 납치되어 한국으로 송환된다. 이에 대한 뒷말을 들어보면 원래 김대중은 자신의 객실 옆방에서 살해될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배에 태워 현해탄을 건넌다. 공작원들은 배에서 김대중을 그대로 수장시키려 했지만 때 마침 미군이 정보를 입수해 비행기를 띄우자 어쩔 수 없이 그를 가택에 연금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교동 자택 별칭은 ‘동교동 교도소’였다. 오랜 가택연금에 지친 김대중은 비서에게 “이게 어디 사람이 사는 집이야? 완전히 갇혀버렸는데”라며 신세한탄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훗날 동교동계 인사들은 ‘동교동 교도소’는 감금된 자는 나갈 수 있지만 다시는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불렀다.
장남 김홍일이 부친과 모친의 결혼기념일을 맞아 자택에 들어서려 시도했지만 이를 제지당해 밖에서 꼬박 몇 시간동안 서 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 후에도 김대중은 신군부의 회유를 거부해 사형까지 선고받는가 하면 라이벌 김영삼의 기습적인 3당합당과 지역구도에 밀려 정치적 좌절을 겪는 등 삶 자체가 좌절의 연속이었다.
김대중 별명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인동초’다. 그는 숱한 ‘고난의 길’ 속 에서도 자기중심을 잃지는 않았다. 미국 망명 시절 그는 자신의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로 손수 빨래를 해왔다. 하루는 그의 지인이 “선생님! 빨래를 몸소 하셨는지요? 이런 것은 우리가 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괜찮아! 세탁이라고 하지만 속옷을 세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씻는 것이네! 혼을 씻는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어찌 자네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라며 호의를 거절했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갈고 닦으며 미래를 준비했던 것.
김대중은 무척 지적이고 논리적인 인물이었다. ‘감의 정치’로 일관했던 라이벌 김영삼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특히 외부에서는 그를 두고 ‘선생님 스타일’로 말하기도 한다. 지난 2000년 김대중은 프랑스를 방문해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적이 있다. 여기서 김대중이 미테랑에게 ‘거북선 모형’을 선물한 적이 있다. 미테랑은 인사말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를 두고 15XX년이라 잘못 말했다. 김대중은 연설이 끝나고 미테랑에게 “임진왜란은 15XX년이 아니라 1592년이다”라고 말해 무안을 주었다.
그의 연설문 작성과정도 무척 복잡하고 논리적이었다. 연설문 초안을 고치는 단계가 무려 5단계였다고 한다. 연설비서관이 작성한 연설문이 마음에 들 경우 그는 별다른 수정 없이 몇몇 부분만 빨간펜으로 고쳐 다시 돌려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자신이 직접 녹음한 육성테이프를 비서관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럴 경우 비서관은 김대중의 육성테이프를 일일이 풀어 연설문을 다시 작성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김대중이 구술한 녹음테이프를 실제 풀어보면 거의 완벽한 문장이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국어실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그는 유머러스한 측면도 있었다. 김대중이 예전에 MBC <일요일일요일 밤에>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 즉흥 출연해 개그맨 이경규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경규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이경규”라고 답했다. 이에 이경규가 “정말 나를 좋아하느냐”고 다시 되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이경규라고 말하지 않으면 편집될 것 같아서요”라고 농을 쳤다. 이를 두고 혹자는 ‘김대중은 코미디를 이해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저항과 탈권위, 노무현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노무현의 어린 시절 키가 작아 ‘돌콩’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워낙 두뇌가 명석해 동네에서는 ‘노천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매일 몇 장씩 외우라고 하는 천자문을 여섯 살 되던 해, 모두 외워 반듯하게 썼다. 봉화산에 소풍 왔던 학생들은 그의 초가집을 지나가면서 “여기가 노천재네 집이래. 어떻게 생겼나 보자”라며 중얼거리고 지나갔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무척 장난기가 가득한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땡땡이는 기본이고 성적표를 위조해 부모를 속이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에는 모친 호주머니에 손을 대, 몰래 주머니칼과 물총을 사 크게 혼난 적도 있다고 한다.
노무현의 저항의식은 어려서부터 유독 두드러졌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백지동맹 사건’이 있었다. 학교에서 이승만 탄생일을 맞아 ‘이승만 작문’을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이는 당시 이승만 정권의 대통령 찬양운동 중 일환이었다. 노무현은 작문시간에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쓰지 말자며 ‘백지동맹’을 선동했다. 노무현은 ‘택도 없다’라는 의미로 종이에 ‘택통령’이라는 작문을 써서 냈다. 결국 그는 주동자로 지목되면서 교무실에서 벌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저항의식은 훗날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인권 변호사 노변’의 탄생과 전두환과 장세동, 이종원 전 법무장관 등 5공 인물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언사와 명패를 날려 주목을 받은 ‘청문회 스타’ 탄생의 기반이 된다.
노무현은 대통령 재직시절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제왕적 대통령 시대의 종언을 알리고 새로운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보면 탈 권위 수준을 넘어 반 권위의 모습을 띠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노무현이 일요일 독립기념관에 불쑥 방문한 일도 유명한 일화다. 그는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고 경호원 몇 명과 가족들과 함께 독립기념관 전시실을 구경했다. 이는 미리 방문 소식을 알리게 되면 지역 경찰과 공무원 등이 모처럼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동원되는 불편함을 없애려는 배려였다.
노무현은 방문 다음날, 독립기념관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관장님도 안 계신데 불쑥 찾아가서 좋은 공부 많이 했습니다. 관리가 잘 되었더군요. 수고하세요”라며 격려했다.
노무현의 탈 권위 퍼스낼리티는 그의 언변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득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임기 내내 그의 발목을 붙잡는 덫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를 보통 노무현의 ‘똥 화법’이라고 한다.
‘똥 화법’은 직설적이고 거친 표현임에 틀림없지만, 듣기에 따라 정감이 넘치고 순수하고 알아먹기 쉬운 노무현 특유의 화법을 지칭한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시절, 아내 권양숙 부친의 좌익활동이 문제가 되자 “그럼 내 마누라를 버리라는 말입니까”라고 일격을 가해 도리어 지지율을 끌어올린 적이 있다.
반면 임기 도중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지요”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하면 나머지는 깽판 쳐도 괜찮다”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라는 특유의 ‘똥 화법’으로 막말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개척자의 퍼스낼리티, 이명박
▲ 이명박 대통령은 경험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한번 마음 먹은 일은 집념을 갖고 밀어붙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무척 가난했기 때문이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명박의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가난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훗날 자신의 모교가 되는 동지상고 이사장집에서 목장일을 돌보던 아버지와 행상일을 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이명박은 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상고 야간반에서 겨우 학업을 잇게 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대 상대에 당당히 합격하지만 그는 입학금이 없었다. 그를 대학에 보낸 것은 그의 어머니가 행상을 나서던 이태원시장 상인들이었다. 이명박의 딱한 사연이 알려지자 상인들은 그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결국 그가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의 개척자적 진가가 본격적으로 발휘되던 시기는 단연 ‘현대건설’ 재직기였다. 정주영 회장은 이명박을 무척 아껴 단 둘이 광화문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명박이 태국 공사장의 재무관리를 맡고 있을 때 일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 태국 공사장에 수십 명의 조직폭력배들이 공사장에 난입해 금고를 털어가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금고 안에는 인부들의 일당과 월급이 들어있었다. 이에 위험을 느낀 직원들은 전부 줄행랑을 쳤지만 거기서 유일하게 금고를 부둥켜안고 있었던 이가 바로 이명박이었다. 그 사건은 그대로 정주영 귓속으로 흘러들어가 큰 신임을 받게 된다.
이명박은 현장에서도 무척 집요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공사 당시 예고 없이 고장 나는 불도저와 기술자들의 텃세를 극복하기 위해 한 가지 수를 쓴다. 본인 스스로 고장 난 불도저를 일일이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보면서 고장 원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날 이후 이명박은 기술자 눈치를 보고 지시만 하는 관리직 사원이 아니라 기술자만큼 불도저를 속속들이 아는 전문가로 탈바꿈한다. 현대 초창기 승용차모델인 포니의 부품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모조리 뜯어낸 일화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집요함은 서울시장 재직시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그랬듯, 아랫사람들에게도 뭐든 직접 해볼 것을 요구했다. 청계천 복원을 앞두고 모 국장이 “복개도로 아래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물이 모두 썩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이명박은 대뜸 “들어가 봤어?”라며 반문했다.
이명박은 얼마 후 직접 청계천을 내려가 봤다. 실제 청계천은 앞서 국장이 말했던 것과 달리 물고기가 헤엄치고 돌아다닐 정도로 수질이 비교적 좋았다고 한다. 그 밖에도 현장을 가보지 않은 국장들의 보고서를 받을 때는 반도 안 읽고 그대로 중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에 대한 평가와 반응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명박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자존심이나 명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를 자주 견지했으며 국민의 ‘느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촛불집회로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을 때, 이명박은 이런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눈이 많이 올 때는 빗자루 들고 쓸어봐야 소용없다. 일단 놔두고 처마 밑에서 생각하는 게 맞다. 눈 오는데 쓸어봐야 힘 빠지고 빗자루도 닳는다.”
그가 말하는 ‘눈’은 결국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리는 기현상을 의미한다. 결국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만큼 주변과의 소통에는 한계를 보여 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