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교실 권력’에 맞선 10대 소녀 성수지로 열연…“연기등급은 A 받고파”
‘술꾼도시여자들’에 이어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의 새로운 효녀작 타이틀이 ‘피라미드 게임’으로 갱신됐다. 학원물에 복수물, 사회고발물이라는 어두운 장르를 한데 묶은 데다 출연진이 대부분 신인이라는 점에서 진입 장벽이 높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공개 직후부터 높은 화제성을 선점하며 입소문을 타고 신규 시청자들을 이끌었다. 티빙 주간 유료가입기여자수 1위를 기록하며 3월 21일 호평 끝에 종영한 이 작품의 주인공, 성수지 역을 맡은 배우 김지연(28) 역시 흡인력 높은 열연으로 방영 내내 화제의 중심에 섰다. 걸그룹 우주소녀의 보나에서 배우 김지연으로 탄탄한 ‘연기 서사’를 쌓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 ‘피라미드 게임’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제가 이 정도로 큰 롤을 맡아본 적이 없었고, 작품 안에 강렬한 학교폭력(학폭) 신이 있다 보니 걱정이 좀 되긴 했어요. 그리고 이전에도 보여드렸던 하이틴 물을 또 한다는 것에서도 부담이 있었죠(웃음). 그런데 대본을 보니 수지가 일단 마냥 착하기만 한 주인공이 아니란 점이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요. 착하고 정의롭지만 냉정하기도 한,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감독님과 작가님께서도 ‘지연 씨 말고는 성수지를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굳건한 믿음을 주셔서 그 말씀대로 작품을 선택하게 됐죠.”
김지연이 연기한 성수지는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백연여고 2학년 5반으로 전학 왔다가 이 반만의 특이한 ‘왕따 놀이’인 피라미드 게임의 타깃이 된 인물이다. 피라미드 게임은 반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기투표를 거쳐 A부터 F까지 등급을 매긴 뒤, 0표를 받은 F등급을 반의 ‘공식 왕따’로 만들어 단순한 괴롭힘 이상의 고통을 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전학 오자마자 F등급을 받게 된 수지는 10대 청소년으로선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학폭에 시달리면서도 어른들에게조차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된다.
“1~2화에선 수지가 학폭을 당하는 신이 많다 보니 큰맘 먹고 현장에 가야 했어요(웃음). 현장에서 직접 보니 제가 마음먹은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하더라고요. 물리적인 고통보단 정신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 찍었을 땐 울기도 했죠(웃음). 하지만 초반에 그렇게 당황스럽고 힘든 감정이야말로 수지가 느끼고 있었을 감정 그 자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감정을 가져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니 후반부의 수지가 그려지더라고요.”
몇 주 뒤 다시 열린 피라미드 게임 투표에서 겨우 F등급을 벗어나게 된 수지는 자신 대신 F등급이 된 친구가 똑같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방관자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 이 모습이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기만 하던 다른 친구들과 똑같다는 것, 그리고 상위 등급을 제외한 아이들의 등급 변화는 결국 주동자의 변덕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부당한 게임을 완전히 없애버리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그렇게 피해자와 방관자, 그리고 시청자의 입장이기도 한 ‘제삼자’를 모두 경험한 수지가 게임의 주동자이자 2학년 5반의 절대 권력자인 백하린(장다아 분)에게 반기를 들고 일침을 놓는 신은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저는 수지의 마음에 100% 공감해요. 하린이가 입은 과거의 피해는 알겠지만, 그게 결코 가해의 타당성도 정당성도 될 수 없으니까요. 수지가 그렇게 얘기해준 것도 너무 좋았어요. 조금이라도 하린이를 이해하지 않고, 어떤 정당성도 주지 않고 ‘넌 가해자일 뿐이야’라고 말해주는 것이요. 사실 저는 수지와 제가 너무 다른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찍으면서 보니 ‘나와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부분이 수지의 이 대사 같은 면모였고요. ‘피라미드 게임’ 같은 상황에서 수지처럼 용기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그래서 수지의 그런 모습을 더욱 잘 표현해 내고 싶었어요.”
‘피라미드 게임’을 통해 김지연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학폭에서 가해자는 가해자일 뿐이고, 방관 역시 가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악역에겐 어떠한 동정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고, 방관자들에게도 그에 맞는 마지막을 선사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메시지 대신 게임의 선정성과 이에 대한 호기심이 먼저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피라미드 게임을 놀이처럼 소비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학교에선 가정통신문을 보내 가정에 관심과 지도를 당부하기도 했다. 제작진은 물론 배우들에게도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가정통신문 기사를 보고 소름이 돋았어요. 저희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미처 닿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미성숙한 아이들의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는 것도 성장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른들의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한번쯤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든, 방관자였든, 간접 경험이든 보고 들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소재에 더욱 많은 관심을 주시는 것 같거든요. 저 역시 이번 작품에서 피해자의 역할을 해보며 학폭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정말로 학폭이 완전히 근절되길 바라요.”
모든 우려와 관심을 넘어 작품 자체만으로 본다면 성공적인 마무리였다. 작품의 무게 중심을 강하게 잡아야 하는 큰 롤이었고, 감정의 증폭은 크되 이를 내세우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연기였던 만큼 김지연에게 있어 ‘피라미드 게임’은 종영 후에도 여느 작품보다 더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작품에서 자신의 연기에 등급을 매긴다면 어떨지 질문을 받고 “A등급이었으면 좋겠다”며 웃음을 터뜨린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의 희열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아이돌과 배우는 둘 다 각자 너무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는 알게 될수록 더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가 준비한 대로 잘 되지 않을 때 오히려 다른 감정이 터지기도 하는데, 그때 느껴지는 희열도 있거든요. ‘피라미드 게임’에서도 그런 희열을 느낄 수 있었고요. 하지만 할수록 더 잘하고 싶은데, 더 모르겠어요(웃음). 이런 게 고민이면서도 동시에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해요. 저 스스로는 연기에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는데 주변 선배님들께 여쭤보니까 ‘원래 다들 그런 거야’라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정말 크게 위안을 받았어요. 그분들도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저도 당연히 고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언제 만족하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정말 열심히 하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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