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 회장 | ||
삼성의 한 인사가 최근 사석에서 던진 말이다. 지난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당시 이재용 상무 등에게 편법증여됐다는 의혹이 아직까지도 법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것에 대한 탄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자의 한숨 섞인 넋두리는 당분간 계속될 것만 같다. 이건희 회장 소환을 둘러싼 세인들의 입방아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정감사 과정에선 이건희 회장 소환에 대한 찬반양론이 격돌해 이 회장 소환조사가 여전히 법조계와 재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큰 관심거리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시켜줬다.
얼마 전 이 회장이 벤플리트상 수상을 이유로 해외로 나가는 과정에서 검찰이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자 “이 회장 소환 시기가 연말이나 내년으로 늦춰질 수 있다”는 말이 나돌게 됐다. 일각에선 아예 이학수 부회장 소환 선에서 끝나고 이 회장 소환 문제는 내년 대선 열기에 묻혀 버릴 가능성마저 제기되기도 했다. 이 회장 소환 문제에 대한 검찰의 어정쩡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수사당국이 이 회장 소환시기를 구체적으로 조율하고 있다는 관측이 법조계와 정치권에서 힘을 얻고 있다. ‘이 회장의 전용기가 10월 13일 오후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돌아오는 운항승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10월 14일이나 15일에 귀국할 것이란 관측이 한때 대두되기도 했다. ‘이 회장 귀국=검찰 소환’이란 공식이 정·관·재계 인사들 뇌리에 자리 잡은 셈이다.
이 회장의 최근 행적을 보면 지난해처럼 장기외유를 할 것 같지는 않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미국에서 벤플리트상을 받고 두바이로 건너가 일정을 마친 이 회장은 일본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회장은 지난해 9월 도피성 논란 속에 출국해 5개월간 해외에 머물다 지난 2월 4일 일본에서 귀국한 바 있다.
이 회장을 근거리 보좌하는 것으로 알려진 박명경 상무가 지난해 11월 말 일본에 갔다가 1월 말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다시 갔다가 2월 4일 이 회장과 함께 귀국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회장이 귀국 전 일본에 상당기간 체류하면서 귀국 시기를 조율했을 것이란 관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서 현재 일본에 머무는 것도 조만간 귀국을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검찰의 이 회장 조기 소환설이 더욱 힘을 받는 배경엔 북한 핵실험 파문도 깔려있다. 한 정보기관은 최근 ‘국정감사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정국이 북한 핵실험 문제에 쏠려있는 이때 검찰이 이 회장을 소환해 여론의 관심을 최소화하려 할 것’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은 수사 관련 첩보를 다루는 기관들 중 북한 핵실험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조직이다. 온 나라의 정치력과 외교력 그리고 첩보망이 북핵에 매몰돼 있는 이때 검찰이 이 회장 소환조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해 후폭풍을 최소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검찰청사 주변에선 10월 안에 이 회장에 대한 공개소환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편이다. 타 정보기관의 예측대로라면 검찰이나 이 회장 측은 북핵 논란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란 전망도 가능한 셈이다.
이 회장 소환 조사가 이뤄질 경우 검찰은 처벌수위 논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이 회장에 대한 여러 가지 목소리가 나올 것이며 이는 검찰을 곤혹스럽게 할 것으로 보인다. 기소할 경우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지 않도록 충분한 진술과 정황을 포착해둬야 하며 기소하지 않을 경우 솜방망이 처벌 의혹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검찰이 이 회장을 기소하든 하지 않든 가장 좋은 것은 관심이 낮은 상태에서 이 회장 문제를 처리하는 것인데 요즘처럼 북핵 논란으로 시끄러울 때가 적기”라 밝히기도 한다.
이 회장 소환과 처벌 수위를 결정해야 할 검찰 조직 내에서도 이 회장 문제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검찰조직 내부에서 고위직 인사들은 ‘처벌할 구실이 약하니 선처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소장파 검사들은 ‘여론을 감안해 꼭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러나 기소 여부를 떠나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결론을 보는 것이 옳다는 점에선 고위직과 소장파가 의견을 같이 한다는 전언이다. 이번 국정감사 과정에서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사건이 수사 시작 이후 담당검사가 11번, 부장검사는 9번 교체되는 바람에 수사가 지연되고 부실해졌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재판과정이 길어질수록 검찰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거세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검찰은 이 회장에 앞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무렵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지낸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과 이학수 삼성 부회장을 소환 조사했다. 그 전에 홍석현 전 주미대사도 소환 조사를 받았다. 정치권과 법조계 일각에선 이 회장 대신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 관여한 거물급 인사가 처벌받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검찰청사 주변에선 이들 인사들 중 특정인을 지칭해 ‘이 회장 대신 혼자 다 책임지는 식으로 불구속 기소될 것’이란 구체적인 추정마저 심심치 않게 나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관측은 수사당국이 이 회장 측과 의견 조율을 마쳤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이다. 벤플리트상 수상을 위해 이 회장이 출국할 당시 검찰이 ‘요구가 있으면 이 회장이 언제든 귀국하기로 약속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삼성-검찰 사전조율설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라 주장하는 인사들도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