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회장 “사전 공모한 산은·무역보험공사 관계자 고소”…‘전쟁’의 승패 이제 검찰 수사에 달려
‘살아있는 권력’ 부패상을 공개한 대가로 그 역시 깊은 상흔을 입었다. 기자회견 후 신 전 차관뿐 아니라 그에게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수갑을 찬 그는 미소를 지으며 “흘러가는 강물을 인위적으로 막을 순 없다”는 말을 남긴 채 구치소로 향했다. 2009년 SLS조선(주)이 기업구조조정(워크아웃) 결정된 지 2년 지난 때였다.
이 폭로가 있기 한 달 전인 그 해 8월, 기자는 이 전 회장을 처음 만났다. 약속을 정해 만났다기보다는 기자의 일방적 취재 접근이었다. 당시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신재민 전 차관 비리를 폭로하려 한다”는 소문이 여의도 정가 일각에서 은밀히 나돌았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만난 그의 입에선 ‘신재민’의 ‘신’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기자에게 변죽만 울렸다. 그가 어느 날 강원도 영월 고씨동굴 인근으로 캠핑을 간다고 기자에게 슬쩍 흘렸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여 따라갔다. 첩첩산중 좁고 울퉁불퉁한 임산 도로에서 그는 지프차를 거침없이, 거칠게 몰았다. 저돌적이었다. 조수석엔 안전벨트를 착용한 채 손잡이까지 꽉 잡은 기자가 탄성과 비명을 지르며 앉아 있었다. 엔진 굉음이 산 전체를 가득 메웠다.
그날 밤 캠핑장으로 돌아와 야영하며 이 전 회장은 기자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동이 터올 때까지.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기자가 알고 싶어 하던, 취재하고 싶어 하던 팩트의 문을 조금 열어 그 검은 내부를 보여줬다.
그날 이후 그는 낮밤 구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이 떠오르면 기자에게 기탄없이 전화했다. 그러면 기자는 서울 지하철 신사역 인근 그의 사무실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당시 이 전 회장은 500원짜리 ‘레쓰비’ 캔 커피와 줄담배를 연신 마시고 피웠다.
△국립 철도고를 나와 40대에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SLS그룹 수장으로 자수성가한 성공담 △신재민 전 차관을 만난 인연과 그에게 건넨 막대한 뇌물 내역 △정치권력이 SLS그룹을 몰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 등 소설 같은, 시나리오 같은 장황한 이야기가 그의 입을 통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그는 그해 9월 추석 연휴 직전 기자에게 ‘팩트’의 전모를 털어놨다. 그리고 며칠 후 기자회견을 했다. 검찰 수사가 이어졌다. 신 전 차관 비리는 ‘의혹’이 아닌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면서 이 전 회장이 그토록 바라던 SLS그룹이 공중 분해된 사연도 세상에 알려졌다.
2009년 워크아웃 당시 SLS조선은 세계 16위, 5만 톤 미만급 탱커제조 조선업체 기준 세계 2위 중견 조선업체였다. 100% 수출기업으로 이국철 지배주주 겸 회장이 이끌었다. SLS조선은 2009년 워크아웃 결정을 받았다. 이후 SLS조선은 신아SB로 회사명이 바뀌었고 2015년 파산했다.
이 전 회장은 “산업은행과 무역공사가 2010년 4월에 권한도 없는 이사회를 동원해 나의 대주주 지위와 대표권을 박탈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주권 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 2022년 대주주 지위를 회복했다.
그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SLS조선 대표이사인 이 전 회장은 5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한 식당에서 ‘2조 원대 국부를 해외로 유출한 산업은행, 한국무역보험공사 고소’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2009년 SLS조선에 대한 사전 파산계획으로 2조 원대 국부를 해외 유출한 산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 관계자 등 13명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다”고 밝혔다.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 유창무 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등 13명에게 배임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 핵심은 2009년 민 전 은행장, 유 전 사장 등이 SLS조선을 고의로 파산시켜 회사에 1조 4000억 원 손실을 끼치고 2조 원대 국부를 해외로 유출했다는 것이다.
이 전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원래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은 SLS조선을 B등급 이상 정상기업으로 평가했다. 워크아웃 대상이 될 여지가 없었다”며 “하지만 무역보험공사가 불법으로 2000억 원에 육박하는 현금이 들어 있는 계좌를 동결했다. 산업은행도 고의로 13억 원의 대출채무를 연체시켜 전산상 신용등급을 미리 C등급으로 낮췄다. 그런 다음 만기 전 대출금 회수, 대출 잔액의 7배가 넘는 담보 유지, 예금 인출 제한 등으로 SLS조선 자금을 옥죄었다”고 주장했다.
SLS조선은 당시 수주한 선박 77척 가운데 30척만 건조하고 나머지 47척은 해외 선주들에게 취소 통보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전 회장은 “산업은행 본점 영업부가 워크아웃 개시 한참 전에 SLS조선 수주 선박 77척 가운데 수주액 30억 달러(약 3조 6000억 원)의 선박 47척 수주계약을 취소해 SLS조선을 파산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계약 취소 이후 해외 선주들에게 선수금을 지급하고 연 7% 가산이자를 반환하며 회사가 1조 4000억 원 손실을 봤다. 해외 선주들은 1조 원 이상 이익을 얻었다”고 말했다.
주채권은행이면서 최대채권자가 우리은행이었음에도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 행세를 했다고도 했다. “법률상 필수요건인 신용위험평가도 없이 SLS조선을 부실징후기업으로 판정했다. 무역보험공사는 보험을 인수한 것에 불과해 채권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최대채권자 행세를 하며 의결권을 행사해 불법으로 강제 워크아웃에 돌입하게 했다”는 게 이 전 회장 주장이다.
그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책기관들이 사전에 공모해 멀쩡하게 잘나가던 중견 조선회사를 파산시켰다. 이것도 모자라 2조 원대 국부를 유출시켰다. 대국민 사기극이다”라고 역설했다.
이 전 회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SLS조선을 고의로 파산시킨 것과 관련된 자료들을 (사법당국 등으로부터) 얻기 위해 2011년에 기자회견 후 구속을 자처했다”며 “결국 차디찬 감방에서 산업은행 등이 SLS조선을 파산시키겠다는 사전계획이 담긴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9년 SLS조선 워크아웃을 계기로 발발한 ‘이국철의 15년 전쟁’은 이번 검찰 고소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는 5월 21일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혼자 조용히 잘 먹고 살려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들 선조가 있어서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후손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발판을 마련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권력자가 나오더라도 대한민국은 존치돼야 합니다.” 이제 공은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 의지에 따라 ‘이국철 전쟁’ 승패가 판가름 난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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