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협위원장들 중심 부활 요구 끊이지 않아…양당 차기 대권주자 당권 장악 노림수
#차떼기 사건으로 지구당 폐지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때였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에 2.5톤 화물차가 주차돼 있었다. 화물차에는 1만 원권 지폐로 150억 원이 들어있었다. 이 자리에서 LG그룹 임원은 서정우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법률특보에게 화물차 차량 키와 화물칸 키가 달린 열쇠고리를 전달했다.
다른 재벌 그룹도 유사한 방식을 사용해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했다. 현대자동차는 스타렉스 두 대에 현금 100억 원을 나눠 남아 전달했고, 삼성은 1000만 원권과 500만 원권 채권 두 개를 합쳐 월간지 정도 크기로 포장해 건넸다.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차떼기 사건)’ 전말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지구당이 불법 대선자금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지목됐다. 당시 지구당은 ‘돈 먹는 하마’로 불렸다. 사무실 유지비, 유급 직원 급여, 당원 행사 개최 비용 등 막대한 운영비가 들어갔다. 이러한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불법 정치자금에 손을 댔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밖에 지구당 위원장 사조직화, 지역 유지와의 유착 등도 문제점으로 거론됐다.
지구당 폐지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오세훈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주도했다. 오 의원은 이른바 ‘오세훈법(정치자금법·정당법·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추진했다.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은 정치개혁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시민단체와 학계가 참여하는 초당파적인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범개협)’을 설치했다. 범개협은 20여 일 만에 지구당을 폐지하기로 했다. 오세훈법 내용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안도 내놨다. 2004년 초 국회는 범개협의 개혁안을 최종 의결했다. 일사천리로 개혁안이 통과된 셈이다.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던 윤현식 지역정당네트워크 정책위원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여야가 모두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했다. 윤 위원은 “당시 불법 선거자금을 받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이 돈을 특정 지구당으로 다 모아서 포장했다. 사실상 불법 정치자금 수수의 중간 거점 역할을 했다”며 “여기에 차떼기 사건이 터지니 지구당이 부패의 온상이고 정치개혁 1순위처럼 됐다. 그래서 2004년 정당법이 개정되면서 지구당이 없어지고 현행 시·도당 체계가 들어선 것”이라고 기억했다.
#지구당 부활 나온 이유
지구당 폐지 후 부작용도 발생했다. 2004년 7월 12일 e윈컴정치뉴스(폴리뉴스 전신) 보도에 따르면 지구당이 사라진 자리를 지역 정치인들이 만든 산악회, 연구소, 포럼 등이 차지했다. 이 단체들은 불법 정치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통로로 의심 받았다. 그러자 지구당의 기능을 대신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2005년 국회는 다시 정당법을 개정했다. 이에 따르면 정당은 지역조직으로 당원협의회를 둘 수 있도록 했다. 지구당은 법으로 정해진 정당의 필수적인 조직이었다. 반면 당원협의회는 정당의 당헌·당규에 의해 설치된 임의기구다. 공식적인 정당 기구가 아니란 뜻이다.
당원협의회는 시·도당 하부 조직이 아닌 당원들의 자발적인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사무실을 둘 수 없다. 유급 직원도 뽑지 못한다. 자발적인 봉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자체 현수막을 걸 수도 없다. 당원은 당협위원회나 위원장에게 후원금을 낼 수 없고, 선거 기간에만 가능하다. 정당이 제공하는 당원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협위원장들의 고충도 큰 것으로 파악됐다. 당협위원장들은 대부분 다음 총선 때 해당 지역구에 출마할 후보들이다. 그러나 당협위원장 이름으로 사무실을 낼 수 없다. 대신 변호사 사무실이나 연구소 등을 차린다. 당원 모집에 나설 수도 없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 선거법 위반이다. 선거일 120일 전까진 현수막을 거는 등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정치 활동을 할 수도 없다. 반면 현역 의원들은 이 같은 규제를 받지 않는다.
고양병 당협위원장인 김종혁 국민의힘 조직부총장은 “당원 모집 활동을 하는 등 정치 활동을 하면 다 선거법 위반이다. 그런데 중앙당에서는 왜 사무실을 열어서 활동을 안 하냐며 (공천) 감점을 준다”며 “우리는 법적으로는 유령인데, 실질적으로는 활동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역 민원도 안 받을 수 없다. 선관위에서도 평소에는 문제 삼지 않는데, 누가 고소·고발을 하면 어쨌든 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원외 당협위원장들을 중심으로 지구당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선거 관리와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공적으로 부담하는, ‘선거공영제’를 채택하고 있다. 선거운동의 자유 보장, 불법 정치자금 수수 예방 등을 위해서다. 지구당 부활을 찬성하는 측은 선거공영제가 정착된 상황에서 차떼기 같은 대규모 불법 정치자금 수수는 재발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지구당이 부활하면 지역 원외 정치인들도 사무실을 열고, 후원금을 모집할 수 있게 된다.
선관위 역시 국회에 지구당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일보 분석에 따르면 2022년 9월 29일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 회의, 같은 해 11월 24일 정치개혁소위, 2023년 5월 30일 법안심사소위에서 선관위는 과거 지구당 폐지 때보다 국민 의식 수준이 높아졌다고 했다. 선관위는 지구당 회계 투명성 확보와 중앙당 예속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전제로 지구당 부활을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이 논문검색 사이트 DB피아를 분석한 결과 2005년 이후 지구당 부활 주장을 담은 논문이 꾸준히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논문들은 △ 선거제도 및 정치자금 관리의 선진화 △ 높아진 유권자들의 눈높이 △ 당원 교육의 필요성 증가 △ 지구당 설치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 활성화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관후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교수는 6월 5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지구당 부활 찬성은 학계의 중론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부패가 심해서 금권선거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나라에서만 할 만한 (제도)”라며 “(시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상황이라면) 일상적인 정치 활동을 보장해 줘야 하는데, 현재는 중앙당 일부만 정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과 한동훈의 노림수
이재명 대표는 5월 23일 부산에서 열린 민주당 당원 행사에서 “지구당 부활도 중요한 과제”라며 정당법 개정안 처리를 시사했다. 이 대표는 2022년에도 지구당 부활을 공약한 바 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지구당을 되살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한 전 위원장은 총선 당선·낙선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서는 한 전 위원장이 당 대표 출마를 앞두고 첫 의제를 제시한 것으로 해석했다.
원외위원장들이 많은 국민의힘 내부에서 지구당 부활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나경원 안철수 윤상현 김재섭 의원, 최재형 오신환 박상수 조해진 당협위원장 등은 찬성 의사를 밝혔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홍준표 대구시장, 김기현·정희용·강민국 의원, 유승민 전 의원 등은 반대한다고 했다.
찬성 측은 △원외 위원장 정치 활동 보장 등 형평성 고려 △지구당 부활을 통해 중앙당 권력 분산과 풀뿌리 민주주의 활성화 등을 근거로 들었다. 반대 측은 △당 대표의 지구당위원장직 장악을 통한 중앙당 집중화 심화 △과거 부패 사태 재발 우려 △전문인력 확보 차질 우려 등을 내세웠다.
이런 가운데 김영배 민주당 의원과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각각 지구당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정당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두 법안에 따르면 정당은 지역당 또는 지구당을 설치할 수 있다. 지역당 연간모금 한도액은 5000만 원(폐지 전 2억 원)으로 제한된다. 사무직원은 1명만 둘 수 있다.
당원협의회 폐지 여부는 차이점이다. 김 의원 안은 당원협의회를 그대로 둔다. 반면 윤 의원 안은 지역당이 당원협의회를 대체하도록 한다. 국회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지구당은 보통 선거구 단위로 설치된다. 그런데 선거구가 많은 지역구가 있다. (김 의원 안은)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으니 지구당 밑에 일종의 지부 같은 형태로 당원협의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당원협의회는 자발적인 조직이기 때문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의원들 생각은 엇갈린다. 두 법안을 공동으로 발의한 의원들 수는 모두 45명이다. 호남 지역 한 중진 의원은 “당원들의 참여가 늘었다. 그리고 금권선거 관권선거 다 금지됐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선거 문화가 바뀌었다”며 “당원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소통을 강화하는 게 필요한데 지구당이 없으니 오히려 불편한 상황”이라고 했다. 한 친명계 의원은 “당론까지는 아니지만, 당내에서 대체로 합의된 내용”이라고 전했다.
법안에 대해 비토 분위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TK(대구·경북) 지역의 한 국민의힘 의원은 “아직 결정을 못 내렸다. 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것”이라고 했다. 다른 TK 지역 의원은 “원외 당협위원장의 고충을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확보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개정안 통과가 어려울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현역 의원들이 잠재적 경쟁자인 원외 당협위원장들의 정치 활동을 풀어주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다.
지구당이 부활할 경우 정치권에선 이재명 대표 당 장악력은 강해질 것으로 점친다. 그동안 민주당 강성 당원들은 재명이네마을 등 커뮤니티에서 글을 쓰고, 거리에서 집회를 열고, 이 대표 일정을 따라다니는 등의 외곽 활동에 주력했다. 지구당 위원장 선출권을 가지게 된 당원들은 당의 시스템에 더 깊숙이 관여할 수 있다. 이 대표의 핵심 지지층인 강성 당원들의 입김이 강해지는 셈이다. 다만 지구당 위원장 선출 방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당 대표가 임명할 수도 있고, 지역 당원들이 선출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대표에게는 불리하지 않다.
국민의힘에서는 민주당이 지구당을 바탕으로 취약 지역인 영남권 공략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종혁 조직부총장은 “민주당은 자신감이 있더라. 영남에 교두보를 만들고 뚫고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며 “(국민의힘 원외 당협위원장이 많은) 수도권에선 민주당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민의힘에 비해 당원도 많고 당비도 많이 걷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전체 권리당원 수는 약 200만 명이고, 국민의힘 책임당원은 약 80만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동훈 전 위원장이 띄운 지구당 부활론에 대해 국민의힘 현역 의원들과 원외 당협위원장들 입장은 엇갈린다. 국민의힘 주류인 대다수 영남권 의원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22대 총선 국민의힘 지역구 당선자 90명 중 영남권 당선자는 59명이다. 3명 중 2명은 지구당 부활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원외 당협위원장 160명 중 103명이 수도권(서울·인천·경기)에 몰려 있다. 이들은 지구당 부활을 찬성한다. 원외 당협위원장들은 5월 30일 ‘원외 조직위원장 일동’ 명의의 성명에서 “여야가 합심해 즉각 (지구당 부활) 입법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한 전 위원장의 지구당 부활 발언은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원내 세력이 약한 한동훈 전 위원장으로서는 7월 25일로 잠정 확정된 전당대회를 앞두고 원외 위원장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다.
김종혁 조직부총장은 “정치개혁은 한 위원장의 화두다. 비대위원장 때부터 이야기했던 것”이라며 “동시에 국민의힘 원외 위원장들이 힘든 상태다. 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우리는 수도권에서 활동할 수 없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외 위원장의 마음을 잡으려는 의도가 깔려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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