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지도자 부임 희망하지만 지도자 육성 시스템 확립이 먼저”
축구계 '어르신' 허정무 전 감독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50년이 넘도록 축구계에 몸을 담아온 그는 선수, 지도자를 거쳐 협회와 구단의 행정가 등 다양한 자리를 거친 인물이다.
6월 A매치 2경기 중 싱가포르전을 치른 이후 허정무 전 감독을 만났다. 경기를 어떻게 봤는지 묻자 그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경기 초반부터 양팀 격차가 크더라. 쉽게 이길 거란 생각이 들어 그랬다"며 웃었다.
A매치 데뷔전을 치른 배준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을 반짝였다. 그는 대전 하나시티즌에서 이사장을 지내면서 배준호를 프로 무대로 끌어 올린 인물이다. 허 전 감독은 "고등학생이던 배준호에게 이미 눈독을 들이던 팀이 많았다. 우리 팀으로 데려오려고 단숨에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작년에 유럽 나가기 전에 인사한다고 찾아와서 밥 먹여서 보냈다"며 "A매치 데뷔전에서 골까지 넣었는데 그런 모습을 지켜 보는 게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최대 보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대표팀의 현재 상황을 이야기할 때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답답한 부분은 물론 있다. 다만 함부로 말하는 것은 자제하려 한다. 잘하고 있는 선수, 관계자들도 있는데 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감독 공백은 빨리 수습해야 한다. 왜 이리 늦어지는지 모르겠다. 대한축구협회는 기술적인 측면과 행정적인 측면이 있는데 이 양측의 협의가 잘 이뤄지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며 "축구의 위상이 높아진 시대다. 더 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는데 이게 무너져버린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평했다.
다양한 인물이 차기 A대표팀 사령탑으로 하마평에 올랐다. 선택의 상황에서 지도자의 국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린다. 거론되는 후보가 국내 지도자냐 해외 지도자냐에 따라 여론은 요동친다. 허정무 전 감독은 "나는 우리나라 감독이 하는 시대가 빨리 열리길 바란다. 팔이 안으로 굽듯이 우리나라 감독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우리 팀을 우리 감독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서도 "외국인 감독을 반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축구에 잘 맞고 헌신적으로 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국내 감독 선임에 대한 바람을 전하면서도 현재 상황으로선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감독을 강력하게 추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도자를 육성하는 시스템이 안돼 있기 때문이다"라며 "좋은 선수들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그만큼 좋은 지도자가 배출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독일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차근차근 밑에서부터 감독 육성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계속 키워내는 중이다. 한때는 유소년 단계부터 지속적으로 외국에서 지도자를 데려와 배우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런 육성 시스템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허정무 전 감독은 최근 축구계를 지켜보며 느낀 또 하나의 아쉬움을 전했다. 20년 이상 인연을 이어온 국가대표팀과 파주트레이닝센터의 작별이었다. 대한축구협회는 더 큰 규모의 트레이닝센터를 원했고 새로운 센터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면서 기존 파주시와 계약이 종료됐다. 새 센터가 완공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 A대표팀을 포함한 각급 대표팀은 트레이닝센터가 없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너무 안타깝다. 센터가 없어진 것은 아닌데 지금이라도 잘 협의해서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 천안에 짓고 있는 센터가 완공되더라도 양쪽에서 운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활용 방도는 얼마든지 많다고 생각한다. 트레이닝센터는 A대표팀만 위한 곳이 아니다. 여자대표팀도 있고 연령별 대표도 있다. 또 우리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경기할 때가 많은데 지리적으로도 이점이 충분하지 않나. 아주 좋은 장소라고 생각하는데…."
허정무 전 감독은 파주 센터가 설립된 비화도 밝혔다. 그는 "내가 첫 번째로 대표팀 감독을 하던 시기(2000년)에 추진됐다. '월드컵을 치르는 나라에 대표팀 트레이닝센터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나'라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축구협회 조중연 전무님과 내가 둘이서 문체부를 찾아가 읍소했다"며 "당시 장관이 박지원 의원이었는데, '허 감독, 그러면 16강 올라갈 수 있어?'라고 묻기에 '예, 자신 있습니다'라고 답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추진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동향(전남 진도)이기도 한 박지원 의원에 대해 "축구계가 고마워해야 하는 분"이라고 짚었다. "파주도 그렇지만 서울월드컵경기장 만드는 데도 힘을 실어줬다"면서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썩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원래대로라면 인천문학경기장이 2002 한일 월드컵 메인 스타디움이다. 축구계에서는 서울을 밀어붙였지만 역부족이었는데 그 중간에서 서울의 타당성을 적극 지원해주신 분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박 의원이다"라고 전했다.
허정무 전 감독은 "또 하나 섭섭한 게 있다"며 입을 열었다. 그가 초대 감독을 지낸 용인축구센터에 대한 이야기였다. 2001년 설립된 용인축구센터는 유소년 육성 기관으로 장기간 숱한 선수들을 키워냈다. 현 국가대표 김진수도 이곳 출신이다. 하지만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산업단지에 부지가 매각됐고 현재는 용인시 내 각지에 초중고 팀이 흩어져 운영되고 있다. 허 전 감독은 "수용 보상을 굉장히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대체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얘기가 없다. 참 아쉽다. 용인 축구인들이 목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용인축구센터 총감독 역임 등으로 유소년 육성 분야에서도 일을 했던 그는 기본기 교육 관련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공을 다루는 기술에만 공을 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에 갔을 때 선수들의 순간 선택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공을 잡고 동료에게 패스를 건네 줄 때 안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비 사이를 뚫는 도전적인 선택을 하더라. 국내로 돌아와서 지도자를 할 때도 선수들에게 이런 부분을 알려주려 했지만 어릴 때부터 습관이 돼 있지 않아 어려웠다"며 "유소년 때부터 그런 부분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축구에 대한 이해도, 어떻게 플레이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그런 부분도 기본기에 속해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허정무 전 감독은 축구 이야기를 할 때면 여전히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떤 형태로든 한국 축구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의지도 전했다.
"나는 축구를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축구를 안 했으면 뭘 했겠나. 축구와 인연을 맺으면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은혜를 입었다. 더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겠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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