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8월 민주당 임시전당대회 권노갑 고문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 일요신문 DB |
권노갑(權魯甲:1930년 2월 28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DJ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를 선대위 고문으로 위촉하면서 아직도 정치권 울타리에 있지만 그 스스로 영 성에 차지 않을 듯싶다. 권력의 단맛,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리울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사에서 ‘측근 정치’ ‘좌장 정치’의 대명사로 꼽히는 권노갑은 40년 이상 DJ의 그림자였지만, 돈을 주무르다 결국은 몰락했던 비운의 정치인으로 남아 있다.
권노갑은 193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거기서(영남권) 자랐으면 그의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목포 개항 이후 전남 목포로 와 거기서 자랐다.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 경제학과를 나온 그는 목포상고 4년 선배인 김대중의 정치 인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도우며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는다. DJ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DJ의 모든 조직과 자금을 관리했다.
▲ 97년 서울 구치소에서 열린 한보 청문회. |
‘일오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가운데 권노갑이 출마를 포기하라고 권유한 사람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낙천자 모임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이 낙천하고 어떻게 됐을까. 이게 권노갑의 힘이다. 김명규 한국가스공사 사장, 김충일 아리랑티비 사장, 김성곤 청소년수련원장, 조홍규 관광공사 사장, 채영석 고속철도공단 이사장, 방용석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양성철 주미대사, 이길재 한국농수산방송 대표이사 회장, 최희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감사, 이성재 한국마사회 상임감사, 길승흠 21세기국정자문위원장 등.
그렇다. 모두 한 자리씩 꿰찼다. 일오회 멤버는 아니었지만 당시 김용술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박문수 광업진흥공사 사장, 조만진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강동련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등도 모두 권 전 고문이 ‘꽂아준’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권노갑의 핵심 측근인 이훈평 전 의원은 “김대중 정부에서 공기업 사장이나 이사, 감사로 간 사람은 78명뿐이다. 과거 정권에 비하면 몇 분의 1 수준”이라며 여론의 질책에 맞섰다. 그 정도로 권노갑은 힘이 셌다. 당시 여권에서는 “권 전 고문과 골프 한 번 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로비가 넘쳐 났고, 실제로 골프 회동이 성사되면 “복권에 당첨됐다”고 외치는 인간 군상들도 있었다 한다.
권노갑의 힘은 뭐니뭐니해도 ‘돈’에서 나왔다. 야당 때부터 DJ의 자금을 위탁 관리했고, DJ도 권노갑 말고는 절대로 돈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자금을 요구하는 정치인이나 당직자들은 권노갑에게 ‘용돈’을 타 써야 했다. 권노갑이 동교동계의 최고위층에서 지휘, 조종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권노갑이 얼마나 돈이 많았냐 하면 당시 김상현 민국당 고문이 권노갑과 골프를 치면서 “싱글 하면 1000만 원”이라고 내기까지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인지 알 순 없으나 그때 사람들은 그런 농담을 모두 믿었다. 돈이 넘쳐났을 때다.
하지만 권노갑은 1997년 큰 결정을 내린다. 대선을 3개월 앞둔 1997년 9월, 권노갑, 한화갑 양갑(甲)과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설훈 윤철상 의원 등 ‘가신 7인’은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저희 김대중 총재 비서 출신 의원들은 김 총재가 집권한다 해도 청와대와 정부의 정무직을 포함한 어떠한 주요 임명직 자리에도 결코 나서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중앙선대위에 팽 당했다 돌아온 김무성 전 원내대표가 그대로 써먹은 문구다)
권노갑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는 것을 강북삼성병원에서 TV를 통해 지켜봤다. 그때 권노갑의 눈물을 봤다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나 그 자리에 있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궁궐 밖에서도 권노갑은 권노갑이었다. 잠시 정치권을 떠나 있었던 그는 1998년 12월 30일 일본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신년 1월 1일에 권노갑의 평창동 집 앞에는 1000명이 넘는 인파가 새해 인사를 하러 몰려 왔다. 차는 오도 가도 못했고, 사람에 치여 새해부터 욕을 해댔다. 그해 2월 권노갑은 당 고문으로 인사발령이 난다.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당의 부름을 받았고 3월부터 당사로 출근했다. 그해 12월 권노갑의 아들 결혼식에는 수천 명의 하객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돈은 신라컨트리클럽 회장이었고, 신부의 이모는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 씨였다. 권력과 돈이 결합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 98년 일본생활을 접고 귀국한 뒤 처음으로 가진 정치인들과 오찬. |
지금 문재인 후보가 권노갑을 영입했지만 그는 선대위에서 ‘계륵’에 지나지 않는다. 버리자니 아깝고 일을 도모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 김홍업씨가 2002년 6월 21일 기업체들로부터 청탁 명의의 돈 22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수감되고 있다. |
DJ의 차남 김홍업(金弘業:1950년 7월 29일~). 1950년 전라남도 무안 출생. 어머니는 이희호 여사가 아닌 차용애 씨다. 1980년 신군부 군사정변 이후 아버지와 함께 체포돼 가택연금을 당한 바 있고, 2년 뒤 미국으로 망명해 인권문제연구소에서 활동했다. 1988년 귀국해 17대 대선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하지만 그는 DJ를 국민 앞에 무릎 꿇린 불효자 중 불효자로 전 국민의 뇌리에 남게 된다.
DJ의 장남 홍일 씨가 국회의원이 되자 홍업 씨가 형의 ‘연합청년회(연청)’를 1995년부터 맡게 된다. 연청은 DJ사단의 홍위병과 같은 조직이었다. 그러면서 정치권은 그가 언제 정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를 항상 관심사항으로 뒀다. 당시 그는 “정치할 일이 절대 없다”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다 1998년, 그가 아태재단 부이사장이었을 때 한 언론인터뷰에서 “가족이다 보니 경우에 따라선 남들이 하기 어려운 말, 직언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약간의 가능성을 연다. 그때 DJ가 김홍업을 제대로 단속했다면 훗날의 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홍업은 뛰어난 ‘정치꾼’이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홍업은 고교 친구와 함께 정치광고 대행사(평화기획)를 만들어 아버지를 돕는다. 1997년 대선에서 ‘준비된 대통령’ 등 DJ의 정치 광고를 맡아 혁혁한 공을 세운 ‘밝은 세상’이 바로 평화기획의 후신이다. ROTC 출신인 홍업은 또 당시 대선 정국에서 전국 ROTC 인맥을 묶는다. 그때부터 조직을 어떻게 결속하는지 능력을 보였다. 그리고 홍업은 능수능란했다. ‘밝은 세상’에서 함께 일한 인맥 대부분을 청와대에 촘촘하게 박아 넣으며 정보를 꿰찼고, 공직에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앉혀놓고 정보를 얻었다. 정보가 돈이 되는 세상이 열렸던 것이다.
▲ 2002년 8월 첫 재판에 나서는 김홍업 씨. |
홍업은 아태재단 부이사장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강남 역삼동의 개인 사무실을 자주 찾았다. 여기서 기업가나 재벌 2세, 고위 공직자와 만났는데 그 판이 차츰 커져서 ‘역삼동 클럽’이 결성됐다. 기업인 연결이나 민원청탁, 로비 등이 모두 역삼동 클럽에서 ‘기획’됐다. ROTC 출신이거나 고향 선후배, 학교 동기 동창들이 돈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와 민원을 넣으면 홍업은 검찰 금감원 국세청 신용보증기금 할 것 없이 조사 무마, 인사 개입 등 전방위로 작업을 벌였다. 어떤 때에는 홍업이 경영위기에 처한 기업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는데 혹자는 “자금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당겼다”고 회고했다.
다시 2002년 6월. 홍업은 업체들로부터 국가기관을 상대로 로비청탁 대가로 22억 8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다. 홍업의 압력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검찰, 예금보험공사, 국세청, 신용보증기금 등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홍업이 돈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홍업은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B 아파트 104동 1102호(51평형)에 가끔 들렀다. 사는 집은 서초동. 홍업은 홍은동 아파트 베란다 한쪽 창고에 거액의 수표 더미를 숨겨놓고 가구로 막아놓고 꺼내 썼다. 수표만 10억 원이다. 홍업의 돈 관리를 전해들은 이웃들은 당시 “돈이 그렇게 많은 줄 알았으면 좀 꺼내 쓸걸”하며 혀를 차기도 했다.
홍업의 치부 행각은 이랬다. 당시 검찰이 밝힌 홍업의 재산은 45억 5000만 원. 현금 10억 원과 예금 8억 원, 서초동 아파트 14억 원, 역삼동 오피스텔 1억 5000만 원, 채권 15억 원, 채무 3억 원이었다. 96년에 5억 원이던 재산이 97년 11억 원으로 뛰더니 98년 이후 14억 원이 더 는다. 홍업은 이 돈 대부분을 대기업이나 정치인 등의 후원금이나 활동비 명목으로 받아썼다고 한다. 집사 역할을 했던 김성환 씨와 김병호 전 아태재단 행정실장이 돈세탁을 해줬다. 새 수표를 헌 수표로 바꿔 쓰는 방식이었다. 이 10억 원은 정주영 당시 현대 명예회장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아파트 베란다에 보관했다가 16개의 차명계좌에 분산 입금한 뒤 다시 100만 원권 수표로 찾아 썼다고 한다. 수표는 현금으로, 현금은 수표로 바꿔 쓰기도 했다.
▲ 2007년 전남 무안에서 재보선에 출마해 유세를 하고 있다. |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