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씨가 B 씨에게 전남편 내연녀의 뒷조사를 해달라며 보낸 업무 지시 문자. |
“피고 A 씨는 원고 B 씨에게 1472만 5000원과 이에 대하여 2011년 7월 1일부터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지난 1월 12일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신흥호 판사의 판결 선고에 B 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년여의 지루한 싸움 끝에 원하던 결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종일관 소송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A 씨가 곧바로 항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두 사람의 악연은 지난 2010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출 1조 클럽에 가입한 대기업 회장의 차녀인 A 씨는 평소에도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종 경호업체를 찾곤 했다. 주로 여성전용 경호업체를 이용했는데 C 사의 대표와는 사적인 대화도 거리낌 없이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C 사의 직원인 B 씨에게 전해진 A 씨의 의뢰 내용은 평소의 일과는 성격이 달랐다. 개인의 신변 보호가 아닌 특정 인물 D 씨의 거주지를 알아봐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당시 A 씨는 C 사 대표를 대동해 미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D 씨의 행방을 좇고 있는 상황이었다. B 씨는 꺼림칙한 마음을 떨칠 순 없었으나 A 씨는 회사의 VIP고객이나 다름없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C 사의 대표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구두 계약으로만 일을 시작해야 했다. 당시 C 사의 대표는 A 씨가 미국 경호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현금으로 결제를 해줬고 ‘회장님 딸’이라는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돈을 못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알고 보니 A 씨가 찾는 D 씨는 이혼한 전 남편의 내연녀로 의심되는 인물. A 씨는 자신의 이혼이 남편의 외도 탓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그 증거를 찾겠다고 나서 B 씨를 고용한 것이었는데 정확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B 씨는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냈다. 당초 예상보다 의뢰 기간이 길어졌으나 금전적인 계산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꼬박 잠복근무를 하다시피 밤을 새워 D 씨의 집으로 추정되는 집 앞에서 대기를 하기도 했고 A 씨의 운전기사 노릇까지 해야 했다. A 씨는 B 씨의 휴대전화가 도청되고 있어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며 번호를 바꿀 것을 요청하는 등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도 보였다.
그렇게 B 씨는 해가 바뀐 뒤에도 A 씨의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A 씨는 차일피일 대금 지급을 미뤘고 오히려 “왜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돈 얘기를 하느냐”며 화를 내 결국 B 씨는 일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몇 차례 A 씨에게 대금지불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했고 지난해 3월 6일 내용증명까지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B 씨는 “미국에 머물던 A 씨가 국내에서도 D 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나를 고용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일을 봐주는 형식이라 돈을 요구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A 씨가 귀국한 이후에는 직원 8명까지 동원해 일을 봐줬다. 초기에 나 혼자 일을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돈을 받지 않겠으니 직원들과 함께 일한 부분만큼이라도 대금을 지불해 달라고 말했지만 이마저도 거절했다”고 말했다.
더 이상 어쩔 방도가 없었던 B 씨는 같은 달 22일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는데 법정다툼도 순탄치 않았다. A 씨는 “늦잠을 잤다” “깜박 했다”는 황당한 이유를 대며 변론기일임에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아 수차례 일정이 연기되기도 했다. 더욱이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세우지 않아 A 씨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으면 해결방안이 없었다. 언니-동생 사이로 지내던 C 사의 대표까지 나서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으나 매번 엉뚱한 답변만 늘어놓으며 ‘나 몰라라’하는 식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B 씨는 “소송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회사 대표와 함께 A 씨를 만나 대금지급을 요청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아빠한테 용돈이 끊겨 돈이 없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인 회장님의 개인 연락처까지 우리한테 넘겼다”며 “결국 A 씨의 아버지에게까지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쪽에서 ‘문자로 자세한 내용을 남겨주면 연락 주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 후로 두 번 다시 연락이 오질 않았다”고 말했다. B 씨는 그 회사 비서실에도 연락해 회장의 답변을 요구했으나 “그런 사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고 한다.
▲ 원고 승소한 1심 판결문(왼쪽)과 B 씨가 작성한 근무일지 사본. |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재판은 돌연 A 씨가 항소장을 제출하며 이전 출발선으로 되돌아갔다. 문제는 본인이 항소를 해놓고도 여전히 법정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 8월 한 차례 조정을 시도했는데 이마저도 A 씨 측에서 거절했다.
B 씨는 “돈도 돈이지만 A 씨의 태도에 화가 나 소송을 포기할 수 없다. 사람을 시켜 일을 부려먹은 것은 인정하면서도 왜 돈을 안주려 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2심에서도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는데 또 다시 책임을 회피한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A 씨의 입장을 듣고자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다만 회사 비서실 관계자는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하나 잘 해결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회장님이 직접 소송에 관여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는 입장을 전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