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는 마지막 걸림돌을 넘지 못해 야권 단일화에는 실패했다. 임준선 기자 |
사실 지난 30년간 국내 정치사에는 세 차례의 ‘후보 단일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한 사례는 1997년 ‘DJP 연합’ 단 한 차례뿐이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게 ‘후보 단일화’ 협상이라는 얘기다. 후보간의 신뢰 부족, 메신저들의 오해와 배신, 약속 파기 등이 얽혀 30%의 성공률을 보인 게 역대 후보단일화의 결과다.
이번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도 일주일간의 시한을 남겨 두고 있지만 별로 진전된 게 없다. 양측은 단일화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방법론 협상을 두고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역대 단일화 과정을 돌이켜 보면 양측의 지금 전쟁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며칠 사이 엄청난 변수와 극적 반전이 있을 것이다. <일요신문>은 역대 후보단일화의 쟁점사안과 타결책 등을 집중 조명해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 전쟁을 예상해보았다.
▲ 1987년 7월 DJ 사면복권 후 YS와 첫 공식회동 모습. 연합뉴스 |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제기된 DJ-YS 단일화는 ‘군정종식’과 ‘수평적 정권 교체’라는 국민의 열망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야권 단일화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DJ가 대선을 불과 두 달여를 앞두고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통일민주당을 박차고 나갔던 것이다. 당시 쟁점사안은 담판이냐 공개경선이냐의 여부였다. YS는 두 후보가 만나 합의추대를 하자는 입장이었고, DJ는 “TV토론이나 전국 공동유세를 한 뒤 국민지지가 높은 사람이 후보가 되도록 하자”고 주장했지만 YS가 그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바람에 단일화는 결렬되고 만다.
DJ-YS 단일화 협상의 분수령이었던 통일민주당 마지막 의총(1987년 10월 20일)에서 이철 의원 등 중도 진영은 물론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할 것 없이 DJ-YS에게 단일화 담판을 요구했다. 그만큼 절박했다. 중도 진영인 이 의원 외에도 당시 통민당 내부에서는 상도동계 김정길, 홍사덕, 박관용 의원과 동교동계의 조순형, 송천영, 장기욱, 박왕식 의원들이 양 후보의 단일화를 적극 주장하며 협상 교두보 역할을 했었다.
사실 마지막까지 양측의 노력은 분명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DJ-YS 동시 출마는 곧 패배였기 때문이다. 주군만 바라보고 있던 정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절박한 노력을 계속했다. 상도동계에서는 홍사덕 의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동교동계에서는 조순형이 중심이 됐다.
11월 12일 평민당 창당 하루 전, 홍 의원과 조 의원은 맨하탄 호텔에서 ‘야권 단일화’를 촉구하는 긴급회견을 준비한다. 당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현역 의원 27명이 호텔방 2개를 빌려 모였다. 그런데 그 곳에서 한 편의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진다. 준비한 야권 단일화 촉구 성명서를 놓고, 불러 모은 의원들이 돌연 성명을 거부하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호텔방을 빠져나간 것이다.
“단일화하지 않으면, 양김이 갈라놓은 당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성명서의 내용에 현실적 부담을 느낀 의원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호텔에 남은 사람은 홍 의원과 조 의원, 박찬종 의원을 비롯한 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 만큼 양김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뜻이다.
당 밖에서도 DJ-YS의 단일화 협상의 교두보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DJ와 YS 모두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일화가 답보상태에 있었던 어느 날, 김 회장이 정계인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한식당 ‘장원’으로 비밀스레 DJ를 불러냈다. 김 회장은 DJ에게 “둘 중 한 사람은 양보해야 한다. YS에게 후보나 총재를 선택하도록 하자”고 제안했고 DJ도 수긍했다. 김 회장은 DJ와의 만남에 앞서 YS 측과도 교감이 있었다. 며칠 뒤, 김 회장은 DJ를 다시 만났다. 김 회장은 풀죽은 목소리로 “없던 일로 해야겠다”고 말했다. DJ의 마지막 카드에 대해 YS 측이 거절했던 것이다. 당시 YS는 대선후보직은 물론 당직 역시 양보할 마음이 없었던 터였다. 결과는 노태우의 어부지리 당선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단일화 협상 실패 원인은 당시 양 후보의 지나친 ‘욕심’이었다. 1987년 6·29선언 이전, DJ는 이미 “만약,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 수용하면 사면복권 돼도 대선 출마 안 하겠다”는 말을 내뱉었으며 YS 역시 “만약 김대중이 사면되고 복권되면 대선 후보직을 양보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DJ가 사면되고 대선이 다가오자, 결국 이들이 내뱉은 약속은 ‘헌 신짝’처럼 내던져졌고 서로는 되레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했다. 국민으로 하여금 볼썽사나운 관경만 연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판’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야권의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당시 여당과 전두환 정권이 의도가 개입됐다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87년 대선이 ‘다자 구도’로 간 것은 철저한 정권의 계산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시작은 당시 정권이 6·29선언 이후 DJ의 사면과 복권을 선물한 것이었다. 국민의 요구도 있었겠지만 이는 대선 ‘다자 구도’를 의도한 당시 정권의 ‘필승 카드’ 성격이 강했다. 만약 DJ가 사면·복권되지 않고 YS만 나왔다면 노태우의 당선은 어려웠을 것이다. DJ에게 건넨 사면 선물은 결론적으로 야권 단일화 실패와 국민의 실망만 야기한 ‘단초’였고 ‘독이 든 성배’나 마찬가지였다.
DJ-YS 단일화 과정에서 당시 정권의 노골적인 ‘훼방 작전’도 대단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세 현장에서의 심리전이었다. DJ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유세현장에는 항상 YS를 연호하는 공작꾼들이 설쳤고, 반대로 YS의 유세현장에는 DJ를 연호하는 공작꾼들이 설쳤다고 한다.
심지어 1987년 11월 1일, DJ가 유세차 머물던 부산 국제호텔에는 “김영삼을 청와대로”라고 외치는 300명가량의 폭도들이 몰려와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두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YS의 광주 유세 현장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YS의 연설현장에서 광분한 청중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 순식간에 연설현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훗날 밝혀졌지만, 이는 당시 보안사령부의 한 처장급 인사가 철저하게 계획한 공작이었다. 당시 정권이 DJ와 YS를 갈라놓기 위해 계획한 치밀한 술수였던 것이다. 결국 ‘DJ 사면·복권 카드’에서 시작한 당시 정권의 ‘단일화 훼방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 DJP연합 협상을 위해 무소속 TK 박태준 의원(맨 오른쪽)이 중재적 역할을 했다. 일요신문 DB |
1997년 DJP연합은 국내 정치사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대선후보가 실제 정권을 창출한 최초의 사례다. 그것도 각각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DJ와 JP가 고도의 정략을 통해 거대여당을 눌렀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찾는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DJP연합이라는 기막힌 단일화 전략이 이미 1년하고도 8개월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대선을 1년 8개월 앞둔, 1996년 4월 23일, 당시 DJ의 정치참모이자 비서실장 역을 맡았던 야권전략가 이강래 전 의원이 한 편의 단출한 전략보고서를 들고 DJ와 독대한다. 당시는 DJ의 국민회의가 의석 79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며 총선 참패로 시름이 깊을 때였다.
이 전 의원은 이때 처음 DJ에게 JP와의 연합 전략을 제안한다. 그는 DJ에게 보고서를 통해 “아무리 궁리해봐도 JP와의 연합밖에 없다. 대선의 요체는 영호남 인구 차(당시 영남 850만 명, 호남 360만 명)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뛰어넘는 방법을 못 찾는다면 결과는 뻔하다”고 주장했다.
그 핵심전략은 자민련의 TK 인사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특히 DJ와 오랜 친분이 있는 박철언 당시 자민련 부총재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그 포섭대상이었다. DJ는 단일화 협상이 본격화되기 전인 1997년 4월 19일과 자민련 전당대회 직후인 5월 26일, 이미 박준규 전 의장과 박철언 부총재와 비밀회동을 가지며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자민련 내 주류인사들이 JP의 단독출마를 부추길 때마다, 이들 TK인사들은 브레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오죽했으면 DJ의 협상전략을 마련했던 이강래 전 의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DJP 단일화 과정에서 DJ가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인물은 아마도 박철언 부총재일 것이다. 지금도 국민의 정부에 박철언 부총재에게 참여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후회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거물급 단일화 메신저가 등장한다. 무소속이었던 거물급 TK 정치인 박태준 의원이었다. 단일화 협상을 위해서는 그의 중재적 역할이 꼭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JP의 단일화 테이블 착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단일화 협상 과정이었던 1997년 9월 29일, DJ는 일본에서 박태준 의원을 만난다. 겉은 축구 한일전 관람이었지만, 애초부터 DJ가 박태준 의원과의 만남을 위해 일본행을 계획했던 것이었다. 어렵사리 성사된 이 자리에서 박태준은 “야권 대통령 후보 단일화가 안 돼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라며 DJ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DJP연합의 교두보에 DJT연합이 있었던 것이다.
공식적인 협상기구가 마련돼 협상에 나선 것은 1997년 7월부터다. 민주당은 ‘야권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대단추)’를, 자민련은 ‘대통령후보단일화협상을위한수권위원회(대단협)’를 각각 공식 협상기구로 내세웠다. 양당의 협상 대표는 한광옥, 김용환 두 위원장이 맡았다. 이 둘은 꼬박 세 달간 머리를 맞대고 협상을 벌였다.
물론 이 둘이 나선 협상테이블은 진통의 연속이었다. 당시 JP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있으면서도 “단일화가 안 될 수도 있고, 독자 출마도 가능하다”는 말을 흘려가며 갈지자 행보를 계속했다. 여기에 당시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DJ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면서 JP는 “만일 사실이라면 중대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JP의 갈지자 행보 뒤에는 ‘내각제 수용 여부’가 걸려있었다. 협상 테이블의 주요 난제는 ‘내각제 수용 여부’였던 셈이었다. 애초 DJ는 JP의 ‘내각제 수용’ 요구에 소극적 양상을 보였지만 단일화 협상 성사의 관건인 ‘내각제 수용’은 피할 수 없는 카드였다. 이러한 JP의 압박 속에서 결국 DJ는 10월 17일, 수화기를 든다. 그리고 그는 JP에 내각제 전격 수용의사를 밝힌다.
DJP연합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10월 27일 밤의 일이다. 당시 DJ는 JP 청구동 자택을 비밀스레 방문한다. 두 후보는 여기서 두 손을 맞잡고 “우리 둘이 남은 여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자”며 굳은 다짐을 했다고 한다. 결국 10월 31일 DJP연합은 타결된다. 합의문에서는 DJ를 단일 후보로 정하고 공동정부의 총리를 자민련 쪽이 맡기로 했다. 총리는 국무위원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갖고 내각은 동등 비율로 배분하는 것으로 했다.
1년 8개월 전 이강래 전 의원의 단출한 전략보고서에서 시작된 DJP연합은 훗날 내각 배분에서의 진통, 순수 내각제 개헌파기 등 부작용을 낳기는 했지만, 일단 정권 장출에는 성공했다. 오랜 준비와 적진의 소수파(자민련 내 TK인사)를 적절히 공략해 만들어낸 고도의 정략술이 DJP연합 성공의 핵심이었다.
▲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는 마지막 걸림돌을 넘지 못해 야권 단일화에는 실패했다. 임준선 기자 |
2002년 10월 15일까지만 하더라도 노무현 후보는 “후보단일화는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연이어 떨어지기만 하는 지지율 때문에 당 내에서는 ‘재경선’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결국 난제가 거듭되면서 노무현 후보는 단일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11월 3일 노무현 후보는 단일화 협상을 전격 선언했고, 11월 7일 선대본부를 중심으로 양측 협상단이 꾸려졌다. 이때 민주당에서는 이해찬 본부장이 나섰고 정몽준 후보 측에서는 이철 당시 단장이 나섰다. 처음 양측이 제안한 것은 민주당이 ‘TV토론 후 여론조사방식’이었고 정몽준 후보 측은 ‘각각 25% 대의원 선출 뒤 경선+50%는 국민여론조사’였다.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것이 양측의 첫 번째 실패였다.
11월 14일, 2차 회담부터 이해찬 본부장과 이철 단장이 전격적으로 물러난다. 이해찬 본부장으로는 협상재개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이가 바로 민주당의 신계륜 신임 추진 단장이었고 정몽준 후보 측은 민창기 홍보본부장을 내세웠다. 앞서 1차 때 협의한 내용을 토대로 결국 국민여론조사 방식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정몽준 후보 측이 “공개돼서는 안 될 여론조사방식이 민주당에 의해 유출됐다. 전면 재협상해야 한다”며 두 번째 협상파기가 벌어진 것이다.
11월 19일 3차 회담이 다시 시작됐다. 민주당에서는 신계륜, 김한길, 홍석기가 나왔고 정몽준 후보 측은 민창기, 김민석, 김행이 나섰다. 특히 회담 내에서는 분위기가 경색될 때마다, 신계륜 본부장과 민주당에서 탈당한 김민석 의원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때도 양측의 기 싸움은 대단했다.
3차 협상장 안에서의 핵심은 여론조사의 ‘설문 문항’이었다.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한 것은 ‘자격’과 ‘능력’이었고 정몽준 후보에게 유리한 것은 ‘당선 가능성’이었다. 결국 기나긴 진통 끝에 양측은 ‘경쟁할’이라는 함축적 단어에 합의했다. 최종 문항은 ‘이회창 후보와 경쟁할 단일후보로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로 결정됐다. 하지만 정몽준 의원이 “역 선택 방지책에 문제가 있다”며 세 번째로 협상을 파기했다.
결국 민주당 측의 전격적인 양보로 정몽준 측의 수정안이 받아들여져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됐고, 11월 22일 두 후보는 사전 TV토론에 나서게 된다. 그대로만 가면 됐다. 그런데 문제는 또 터졌다. 11월 23일, 여론조사를 하루 앞두고 사전 계약한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돌연 조사를 포기하겠다는 연락을 했다. 여론조사 하루 전날, 협상 전체가 날아갈 대위기에 봉착한 것이었다. 이에 신계륜 본부장과 김민석 의원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국내 업계 TOP20 여론조사기관 연락처를 두고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기관들은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R&R과 월드리서치가 조사에 나서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말 많고 탈 많은 여론조사가 실시됐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간발의 차(1.8%차)로 선출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마지막 반전은 12월 18일, 선거일을 단 하루 앞두고 또 일어난다. 이날 공동유세현장에서 노무현이 “민주당에는 좋은 인재들이 있다. 앞으로 그들이 경선하면 다음 대선과 민주당의 미래가 밝다”는 말을 꺼냈다. 정몽준 의원은 이를 두고 자신을 무사한 처사라 생각했고 돌연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단일화 합의에는 성공했지만 마지막 걸림돌을 넘지 못해 야권 통합에는 성공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단일화가 됐던 셈이었다.
단일화 협상은 고도의 정치술이 총집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힘든 싸움의 연속이다. 현재 단일화 협상을 진행 중인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 역시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내 정치여건상, 매번 반복되는 야권 단일화 협상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서원대 정상호 사회교육과 교수(올해 ‘1987년 대선과 후보단일화 논쟁의 비판적 재평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는 “국내 정치여건상 단일화 협상은 필연이다. 한국은 정당체제의 미정착과 더불어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제도적 영향이 큰 국가다. 단일화 자체가 후진적 정치문화와 현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서유럽처럼 3~5개 정당이 경합하는 온건 다당제의 연합정치와 연립정부가 수반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며 “현재 단일화 협상에 나선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후보 선출에서 더 나아가, 내각배분과 공동정부운영의 큰 원칙(새 정치 공동선언을 발전시킨 형태)을 당당히 합의하고 국민들에게 설명과 설득을 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라고 지적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1956년 싱거운 단일화…참패
국내 최초의 야권 단일화는 지난 1956년 대선 당시에 있었다. 대선을 앞둔 그 해 1월, 민주당 창당 후 줄곧 당을 이끌어온 조병옥과 신익희가 단일후보 협상에 나섰다. 협상은 조병옥의 ‘자진 양보’로 싱겁게 끝났고 결국 신익희는 민주당 단일 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신익희는 이후 진보당 조봉암과 2차 단일화 협상에 나서다 그해 5월, 유세 중 급사했다.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선 조봉암(216만표)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504만표)에게 완패했다.
1963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대항하기 위해 야권 후보 단일화가 진행됐다. 당시 민정당 윤보선 후보 외에 ‘국민의 당’을 창당한 허정과 박정희 대선 출마에 반대하다 수감된 자유민주당 송요찬 등이 출마했다. 옥중 출마한 송요찬은 대선을 앞두고 군정 종식을 외치며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허정 역시 막판에 사퇴하며 윤보선에게 야권 단일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윤보선(454만표)은 박정희(470만표)와 겨뤄 근소한 표차(1.5%)로 당선에 실패했다.
1967년 대선에서도 또 한 차례의 야권 후보 단일화 시도가 있었다. 앞서 두 번의 단일화가 ‘양보의 미덕’으로 이뤄졌던 것과 달리 1967년 야권 단일화는 정략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1965년, 여당의 한일협정체결을 막지 못해 당권에서 밀려났던 윤보선은 신한당을 창당해 대선 후보로 나섰다. 기존의 민주당에서는 유진오가 대선 후보로 나섰다. 둘은 대선 필승을 위해 단일화 협상에 나섰다. 두 후보는 결국 장시간 진통 끝에 합당(신민당)을 결정하고 윤보선은 대선후보를, 유진오는 당권을 맡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1967년에서도 윤보선(452만표)은 박정희(568만표)에게 10.3%포인트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뒤 정치권의 단일화 시도는 없었다가 1987년 김영삼-김대중의 단일화 전쟁으로 부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새누리 “문·안 단일화, 후보 매수”선관위 “대가 오가야…적용 안돼”
▲ 이정현 |
선관위 측은 이에 대해 “내부 검토 결과, 현재 야권 단일화는 후보매수죄가 전혀 적용 안 된다. 후보매수죄가 적용되려면, 선출자가 낙선자의 선거비용을 갚아줘야만 적용 가능하다. 정치적 협약에 따른 훗날 자리를 배분하는 것은 적용하기 어렵다. 그렇게 따지면 1997년 DJP연합도 불법이다”라며 후보매수죄 검토 가능성에 대해 일축했다.
앞서의 단일화 ‘박사’ 정상호 교수 역시 이번 논란에 대해 “새누리당의 이번 후보매수죄 주장은 정당 간의 후보연합과 선거연합이 일상적인 서유럽에서 보면 웃긴 일이다”고 지적했다.
한편, 후보매수죄는 공직선거법 제232조 1항 2호에 해당하는 법 조항으로 ‘후보자를 사퇴한 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이었던 자에게 금전이나 직을 제공하거나 의사표시를 한 자, 또는 제공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자’를 처벌하고 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