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애초 단일화 ‘데드라인’으로 후보등록 마감일인 11월 26일까지로 정했다. 문-안 두 후보가 후보 등록일 이전 단일화에 목을 맨 까닭은 후보등록 전까지 사퇴한 후보의 이름과 기호는 투표용지에 아예 기입되지 않기 때문에 단일화 효과를 확실하게 누릴 수 있다.
반면 단일화 시기가 후보 등록일을 넘기게 되면 두 후보 모두 일단 대선 후보로 등록하게 되고 투표용지에도 두 사람의 이름과 기호가 기입된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이 극적으로 단일화를 이루더라도 용지에는 이름과 기호가 남아 투표자들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 민주당 측에서는 “두 후보 이름이 모두 남아 있으면 유권자들이 혼란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100만 표 정도를 날릴 수 있다. 이번 대선이 박빙일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는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 사안”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0년 6·2 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무효표가 전체 투표수의 약 4%를 차지하는 18만 3387표 나왔는데, 이는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가 투표일 하루 전날 사퇴한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심상정 후보의 이름과 기호가 그대로 투표용지에 남아 있어 투표자들이 큰 혼란을 겪었고 그것이 전부 무효표가 된 것이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와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서 2위를 한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의 차이가 19만 1600표였던 점을 감안하면 18만 3387표의 무효표가 승부를 갈랐던 셈이다.
이런 ‘억울한 일’이 이번 대선 판에서도 벌어질 수도 있다. 현재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양측이 합의에 실패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일단 두 후보 모두 후보등록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선관위는 11월 26일까지 후보등록한 모든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투표용지 인쇄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인쇄 날짜가 등록마감일 바로 며칠 뒤가 아니라 선관위는 약 2주일 뒤인 12월 10일에 인쇄를 한다고 미리 공고를 했다.
여기에서 미묘한 정치적 파장이 발생하고 있다. 선관위는 지금까지 투표용지 인쇄를 ‘아무 생각 없이’ 후보등록 며칠 뒤 실무자들의 판단에 따라 처리해온 게 관행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의 경우 야권의 피 말리는 후보단일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용지인쇄 날짜조차도 민감한 변수가 되고 있다. 선관위 관계자는 “어떤 정치적 고려도 없었고 실무진들이 자체 판단해서 결정했다. 지금까지는 대충 인쇄날짜를 정했는데 이번에 선관위 내부 규정을 따로 정해 명문화했다. 이번 단일화 일정과는 무관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선관위는 대선을 앞두고 인쇄용지 날짜까지 정치적 논란을 빚자 상당히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선관위의 인쇄날짜 확정에 대해 여야는 미묘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일단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는 단일화 협상 마감일을 11월 26일보다 약 2주간의 더 시간적 여유를 얻은 셈이 됐다. 대국민약속을 통해 11월 26일까지 단일화를 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그 후의 단일화 또는 한 후보의 사퇴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사안이고 현실성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인쇄날짜 직전인 12월 9일까지 산술적으로 연기가 가능하게 된다.
인쇄시작 전날인 12월 9일까지 후보사퇴를 선관위에 신고하면 기호와 이름 옆에 해당 후보가 사퇴했음을 알리는 표시가 추가된다. 후보자 기호 옆에 ‘사퇴’를 뜻하는 빨간줄을 긋는 방식이 될 것이라는 게 선관위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럴 경우 야권은 앞서의 경기도지사 지방선거 때의 ‘참사’만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투표용지에 한쪽이 사퇴했다는 표시가 있기 때문에 투표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단일화 효과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다. 반면 용지인쇄 이후 두 사람이 단일화에 합의한다면 경기도지사 선거 때처럼 야권 단일후보가 막대한 표 손실을 볼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선관위가 문-안 후보에게 2주간의 단일화 협상 시기를 더 연장해준 꼴이 되자 새누리당이 발끈하고 나섰다. 이정현 공보단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17대 대통령 선거 때는 투표용지 인쇄가 빨랐는데 이번에는 늦춰졌다. 야권 단일화가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에 지금까지 해온 관행을 바꾸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선관위가 투표용지 인쇄 시점을 ‘이례적으로’ 12월 10일로 정함에 따라 두 후보의 단일화 시점이 늦춰질 가능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지난 2002년 대선 때처럼 대선 막바지에 후보 단일화의 극적인 드라마가 또 다시 펼쳐진다거나, 단일화 시간이 늦춰질수록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할 것이란 불안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공보단장은 “투표용지가 썩거나 상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지금까지의 관행을 바꿀 필요가 있는가. 지금까지 해온 식으로 하면 될 일”이라며 “단일화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쇄를 늦춘 것은 신중치 못했다”고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