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5년 박성용 명예회장의 영결식장에서 그의 아들이자 장손인 박재영 씨(왼쪽)와 박삼구 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씨. | ||
그러나 최근 들어 장손을 뺀 나머지 총수 형제들의 계열사 지분이 계속 늘자 형제경영의 틀이 깨질 가능성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일각에선 장손의 이름이 대주주 명부에서 사라질 가능성마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양대 지주회사 중 하나인 금호석유화학의 경우 총수일가 4형제 집안에 지분이 균등하게 배분돼 있다. 장남 고 박성용 명예회장 아들 박재영 씨와 고 박정구 회장 아들 박철완 씨가 각각 10.01%를 갖고 있으며 삼남 박삼구-박세창 부자와 사남 박찬구-박준경 부자 또한 10.01%씩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지주회사인 금호산업의 지분구조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좀 다르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고 박성용-박재영 부자의 몫은 줄어드는 반면 나머지 3형제 부자의 지분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8일 금호산업의 최대주주인 금호석유화학은 금호산업 지분 12만 8700주를 매각했다. 그런데 같은 날 박철완-박세창-박준경 씨 명의 지분은 각각 4만 2900주씩 균등하게 늘어났다. 4만 2900주는 금호석유화학이 매각한 금호산업 지분 12만 8700주를 3분의 1로 나눈 양이다. 즉, 금호석유화학이 갖고 있던 금호산업 지분 일부가 장손인 박재영 씨를 제외한 나머지 삼형제 부자에게 골고루 배분된 셈이다. 이로써 고 박정구 회장 아들 박철완 씨와 박삼구-박세창 부자, 박찬구-박준경 부자는 금호산업 지분을 5.54%씩 균등하게 나눠 갖게 됐다. 반면 박재영 씨는 3.59%에 머물렀다. 장손 박재영 씨가 균등배분을 골자로 한 형제경영의 틀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금호산업 지분 구조의 변화는 이미 지난해 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7일 금호산업이 금감원을 통해 ‘최대주주 등 소유주식 변동 신고서’를 공시할 때까지만 해도 금호아시아나 총수 4형제 부자의 금호산업 지분은 4.47%로 동일했다. 그런데 지난해 4월 11일 공시 내역에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박재영 씨 지분은 4.47%로 유지된 반면 나머지 형제 부자들의 지분은 5.13%로 늘어난 것이다. 이후 박재영 씨 지분은 3.59%까지 줄어들었고 나머지 형제 부자들의 지분은 꾸준히 늘어왔다. 이와 동시에 금호석유화학은 금호산업 지분을 줄여나갔다. 금호석유화학의 금호산업 지분이 축소되는 양만큼 박재영 씨를 뺀 나머지 형제 부자들의 지분이 늘어나는 식의 지분구조 변화가 진행된 것이다. 금호석유화학의 금호산업 지분이 박재영 씨를 뺀 나머지 형제들에게만 골고루 분배되는 셈이다.
금호아시아나 총수일가의 장손 박재영 씨에 대해선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른 사촌 형제들이 경영 관련 전공을 택했던 것과는 달리 영화 관련 공부를 한다는 정도가 알려졌을 뿐이다. 고 박성용 명예회장의 미망인 마가렛 클라크 박 여사도 문화재단 행사에는 모습을 비치지만 회사 경영에는 거리를 두고 있어서 재계인사들은 박재영 씨를 비롯한 고 박 명예회장 유가족이 금호아시아나그룹 경영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는 지난해 금호아시아나가 인수한 대우건설 지분 분배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박삼구 회장이 직접 대표이사를 맡을 정도로 그룹에서 핵심 계열사 반열에 올려놓고 있는 대우건설 지분은 박재영 씨를 제외한 나머지 총수형제 부자들에게 0.02%씩 골고루 배분됐다. 오는 4월 9일 주당 500원씩의 현금배당이 이뤄질 예정인데 대주주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박재영 씨 몫은 한 푼도 없지만 나머지 총수형제 부자는 각각 6만 7400주(0.02%)를 보유한 덕분에 3370만 원씩의 배당액을 수령 받는다.
향후 장손 박재영 씨가 그룹 경영과 무관한 행보를 걷게 될 가능성이 높게 거론되지만 이것이 금호아시아나 형제 간의 재산다툼으로 이어질 거라 보는 시각은 드물다. 재계인사들은 금호아시아나 총수형제 중 삼남인 박삼구 회장이 고인이 된 형들과 그 유가족들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재계인사들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 주목하기도 한다. 고 박성용 명예회장이 일궈놓은 문화재단이 박재영 씨 몫이 되는 동시에 박재영 씨가 그룹 경영과는 담을 쌓는 시나리오를 거론하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 지분 중 일부인 14만 5340주를 문화재단에 증여해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문화재단으로의 증여는 별도의 상속세를 물지 않아 그룹의 부담이 크지 않다는 점도 ‘박재영 지분 감소=문화재단 지분 증가’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박재영 씨 몫의 금호산업 지분이 줄어들고 문화재단의 몫이 늘어나는 과정을 다른 재벌가의 계열분리 작업에 비유하는 인사들도 있다.
금호석유화학과 문화재단의 지분을장손 몫으로, 최근에 인수한 대우건설은 현 박삼구 회장 중심으로, 나머지를 다른 형제의 몫으로 배정하는 식으로 3세 이후의 분가 구도가 짜이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그런 예다.
‘극단적인 전망’도 있다. 박재영 씨 지분이 점점 줄어들고 나머지 형제 부자들의 몫은 계속 늘어나는 최근의 흐름이 지속될 경우 언젠가 금호아시아나그룹 대주주 명부에서 박재영 씨 이름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금호아시아나 총수형제 중 오남인 박종구 과기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그룹 계열사 지분구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의 형제경영은 경영에 참여해온 형제들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만약 재계인사들의 예상대로 박재영 씨가 향후 경영일선에 뛰어들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대주주 명부에 적힌 박재영 씨 이름도 곧 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