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유례없는 파행을 겪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 심기를 건드리는 등 대립적인 스탠스를 취한 것과 관련해 외교가에선 ‘벼랑 끝 고육책’이란 분석이 나온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주고받은 모습은 전 세계에 생생하게 송출됐다. 2월 28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전쟁을 매조지은 뒤 미국이 ‘안전보장’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진은 젤렌스키 대통령 요구와 상관없이 ‘종전 구상’을 압박했다. 종전 구상 핵심 의제는 광물협정이었다.
우크라이나 천연자원 및 인프라 수익 50%를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공동 소유한 기금에 투입하는 것이 광물협정 기본 골자다. 우크라이나는 광물협정에서 ‘절반’을 떼어주는 대신 미국이 자국 안전보장에 적극 개입하길 원했다. 트럼프 행정부 생각은 달랐다. 안전보장을 전제하지 않은 조속한 종전 입장을 고수했다.
이 같은 상황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상회담 현장에서 ‘발끈’했고,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진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면박을 주며, 그를 백악관에서 쫓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이 합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빠질 것”이라면서 “우리가 빠지면, 당신은 끝까지 홀로 싸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3월 3일(미국시각) 미국 국방부 익명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평화를 위한 성실한 약속을 입증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판단할 때까지 미국이 현재 제공 중인 모든 군사원조를 멈추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비행기나 배편을 통해 폴란드를 비롯한 제3국에서 대기 중인 우크라이나행 물자 등에 대한 군사원조 중단을 선언한 셈이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양국 정상 간 ‘강대강 대치’에 따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시기도 미궁 속으로 빠지는 분위기다. 양국 정상의 극단적인 대치는 2024년 1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200억 달러 규모 차관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4년 10월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200억 달러 규모 차관 계획을 밝혔고, 그 계획을 같은 해 12월 11일 이행했다.
G7 주도 500억 달러 비상수입가속화(ERA) 대출 가운데 미국 부담 20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에 빌려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차관은 동결된 러시아 국채 자산 수익금을 통해 충당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차관이 이뤄질 당시, 트럼프 행정부 ‘황태자’로 불리는 일론 머스크 미 정부효율부 장관은 소셜미디어 X를 통해 “우리가 이미 얼마나 보냈느냐”면서 “이것은 미친 짓을 넘어선 것”이라고 격분했다.
일론 머스크 미 정부효율부 장관. 사진=연합뉴스우크라이나는 장기화되는 전쟁 국면 속에서 황폐화된 에너지 기반시설 복구 등 재정적 수요가 급증한 상황이다. 그런데 더 급한 불이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 군인과 공무원에 대한 급여다.
러시아 현지 소식통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금액은 별도”라면서 “200억 달러 차관은 결국 우크라이나의 행정, 공공, 안보 인프라에 숨을 붙여놓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순풍을 만났던 우크라이나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사실상 비상사태에 돌입한 형국”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군인들이나 공무원 월급으로 나가야 할 돈을 지원할지 여부와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가 재검토 및 재편성 가능성을 시사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전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큰 비상상황을 맞았다. 미국이 지원한 돈은 우크라이나 공공시스템 산소호흡기나 다름없다. 그 호흡기를 떼면, 내부적인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 최대 불안요소를 트럼프 행정부가 건드린 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화상연설 장면. 사진=연합뉴스이 소식통은 “우크라이나 자금줄을 압박하면 전쟁은 빨리 끝날 수밖에 없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투트랙 협상을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미우 협상에서 광물협정이 핵심 의제인 것처럼, 미러 협상에선 브릭스(BRICS) 통화 구축을 막으려는 미국의 입장이 핵심 의제로 떠오를 것”이라고 관측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내부 지지 결속뿐 아니라 국제사회 동정여론을 확산시킬 계기를 마련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금전적인 어려움을 애국심 고취를 통한 ‘깃발 결집효과’로 해결하려는 포석일 수 있다는 얘기가 뒤를 잇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트럼프 대통령은 국제사회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이웨이’를 이어가고 있다. ‘관세 폭탄’을 이곳저곳에 떨어뜨리며 MAGA(다시 미국을 위대하게)의 행동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친 바이든 성향’으로 공격했다. 내부 정치 이슈로 타국 정상을 공격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빚어진 마찰을 ‘미국 국내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여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움직임이란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협상을 통해 브릭스 통화 구축을 막아내려는 구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직 외교가 관계자는 “젤렌스키는 고육책을 써서라도 ‘미국 중심 안전보장’ 메시지를 피력해야 했고, 트럼프는 젤렌스키 고육책을 받아치는 한편, 향후 러시아와의 협상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설전을 펼친 뒤 취재진을 집무실에서 퇴장시키며 “이건(젤렌스키 대통령과 설전은) 대단한 TV쇼가 될 것”이라고 비꼬았다. 앞서의 전직 외교가 관계자는 “코미디언 출신 젤렌스키 대통령과 토크쇼 MC 출신 트럼프가 각자 처한 정치적 입장에서 설전을 주고받는 장면은 ‘쇼 전문가’들의 고차원적 정치쇼처럼 보였다”고 바라봤다.
서로 마주보는 젤렌스키와 트럼프. 사진=연합뉴스두 정상의 충돌과 관련해 세계 각국에선 우려가 쏟아졌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척 헤이글 전 미국 국방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외교정책 변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면서 “미국의 신뢰성과 예측 가능성이 심각하게 손상됐다”고 했다.
바르토시 치호츠키 전 주 우크라이나 폴란드 대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자신의 본능에 크게 의존하고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다”면서 “복종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