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도 현역이신 실존 인물을 베이스로 하고 있어서 연기할 때 그분의 모습, 생각, 버릇 같은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기댈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죠. 내가 바둑을 두면서 마음 속엔 긴장, 환희, 절망 같은 엄청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정적인 가운데서 표현해야 하거든요. 거기서 오는 미세한 감정들이나 떨림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러므로 이런 미세한 모습들을 잘 캐치하시려면 극장에서 보셔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웃음).”
세계 최고 바둑 대회에서 국내 최초 우승자가 된 조훈현은 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바둑 신동으로 불리던 이창호를 제자로 맡는다. 한 지붕 아래서 함께 먹고 자며 아들처럼 가르치고 키워낸 그와의 첫 사제 대결, 조훈현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세를 탄 제자에게 충격적으로 패하게 된다. 좋게 말해 ‘청출어람’,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바둑사의 쿠데타’로 불렸던 이 사건 아닌 사건이 영화 ‘승부’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조훈현 국수의 당시 외모부터 버릇, 말투와 바둑돌을 두는 습관까지 틀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구현해 낸 것을 두고 ‘승부’ 시사회에 참석했던 조 국수는 이병헌에게 “나인 줄 알았어”라는 소감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연기에 있어 무엇보다 바둑돌을 두는 법을 완벽하게 소화해야 한다는 조 국수의 당부에 따라 이병헌은 “바둑판에 바둑돌이 ‘착’ 달라 붙도록 한참을 연습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제가 바둑을 잘 모르거든요(웃음). 연습할 때는 국수님이 말씀하신 그 느낌이 나도록 프로다운 손놀림, 돌 하나를 둘 때 나오는 그 포스가 가장 중요했어요. 그래서 바둑 실력은 상관이 없었죠(웃음).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딱 갖다 붙이는 순간 그 울림이 정말 조 국수님이 승부할 때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를 많이 고민했어요. 사실 저는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바둑이 너무 어려워서 배우고 싶단 생각은 잘 안 들더라고요(웃음). 제가 아들하고 오목을 두면 이기는데, 체스를 두면 백전백패였어요. 제가 이런 쪽에 재능이 좀 없나 봐요(웃음).”

“한 집에서 살며 내 아들처럼 키운 제자가 나와 함께 결승전에서 붙었고, 이후 돌아올 때도 또 함께해야 했던 그 차 안에서 느껴지던 공기가 기억나요. 나로서는 정말 단 1%도 생각지 못한 패배를 겪고 그 당혹스러운 감정을 가진 채로 집에 돌아오는데 집안도 적막하기 그지없어요. 그 적막한 집안에서 저와 창호, 그리고 제 아내까지 셋이 모두 어떻게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묘한 감정들을 서로 느끼고 있죠. 어떻게 보면 바로 그 묘한 감정들이 이 드라마틱한 영화의 가장 핵심 정서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아마 유아인 씨도 그런 정서를 연기하고 싶어서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마침내 유아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 영화가 극장에서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 뻔한 ‘문제의 인물’ 유아인은 2023년 12월 프로포폴 등 마약류 상습 투약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으나 지난 2월 집행유예로 감형돼 석방됐다. ‘유아인 쇼크’의 직격탄을 맞았던 ‘승부’는 개봉 일정이 무기한 미뤄졌고 이병헌과 함께 공동 주연인 그의 분량을 편집할 수 없어 창고영화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관객들 앞에 선보일 수 있게 됐지만 모든 홍보 행사에서 유아인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개봉을 결정했다. 그에 대한 원망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병헌은 담백하고 짤막하게 유아인의 ‘연기’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했다.

4년 동안 마음 졸인 제작진과 출연진들에겐 불행 중 다행으로 ‘승부’는 개봉 전 시사회에서부터 꾸준한 호평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꽤나 까다로운 관객 1명에게도 이미 합격점을 받아냈단다. “제 아들이 이제까지 봤던 제 영화 중에 ‘승부’가 1등이래요”라며 웃음을 터뜨린 이병헌은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아들에게 있어 영화의 시작을 전달해주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네다섯 살 때부터 저희 아버지가 무릎에 저를 앉히고 ‘주말의 영화’를 보여주셨어요. 영화의 이야기도 해주시고, 배우도 누군지 말씀해주시고 그랬죠. 또 극장에도 데려가셨고요. 아버지가 정말 할리우드 영화 마니아셨거든요. 어쩌면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영화를 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아하셨어요(웃음). 사실 저는 전공도 연기와 관련된 게 아니었고, 아버지를 통해 ‘나도 배우가 돼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참 컸다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고요. 언젠가 저도 제 아버지가 제 안에 영화의 이야기를 심어주셨듯이, 아들에게도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싶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