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문재인 |
민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이에 대해 “민주당은 선거 내내 거만하고 건방졌다. 그들이 안철수 전 후보를 옹립하고 당을 해체한 뒤 신당창당을 하는 수순으로 갔으면 대선의 프레임 자체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게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이었다. 하지만 친노세력의 저항으로 대선 막판까지 임명직 불참여와 같은 쇄신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몇 줌 안 되는 기득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야권과 진보진영은 이제 깊은 침체기로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구조적 모순에 후보 개인의 소극적인 태도도 패배를 자초하는 원인이 됐다. 사실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친노그룹의 이해찬-박지원 동맹이 고르고 고른 인물이 바로 문재인이다. 하지만 문재인에 대해서는 친노그룹 내부에서도 “한 방이 없다”는 얘기가 선거 기간 내내 나왔다. 문 캠프에서 일한 한 친노그룹 인사는 이번 대선 전에 “2002년 ‘노짱’과 함께할 때는 힘들었지만 재미가 있었고 신바람이 났다. 당시엔 정말 민주당에서 곳간 열쇠도 안 줘서 돈도 하나도 없고 당 차원의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었는데 별로 힘든 줄 모르고 잘 버틴 것 같다. ‘노짱’이 워낙 승부사 기질이 있고 사람들 가슴을 뛰게 만드는 사람 아니냐. 노짱이 한 번 나서면 바람이 일어난다는 게 눈에 보였다. 당장은 지고 있어도 금세 역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는 노짱과 많이 달랐다. 한방이 없다. 그 대신 꾸준하게 올라가는 스타일이다. 노짱이 비해 실수도 적게 하고. 그러니 솔직히 재미는 별로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방이 없다는 건 후보에겐 치명적이다. 안철수 전 후보가 포기하고, 범야권이 똘똘 뭉쳐서 지원을 해줬고 투표율마저 높은 수치를 기록했던 이번 선거는 선거전문가들이 볼 때도 도저히 질 수 없는 것이었다. 후보가 4050세대의 자영업자와 주부들에게 특히 인기가 없다는 민주당 자체분석 결과도 나왔지만 끝까지 그 계층을 공략하지 못했다. 대중유세와 TV토론 등에서도 박근혜 후보를 압도하지 못한 것도 준비와 능력 부족이었다.
문 후보는 과단성도 부족했다. 대선전 막판에 ‘친노 백의종군 선언’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왔지만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양정철 등의 일부 강성인사가 반대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후보의 의지 문제였다. 문 후보는 그런 전략을 모두 ‘정치 쇼’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한 선대위 간부는 “문재인 후보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표에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해도 잘 듣지 않는다. 그런 걸 다 정치 쇼라고 보는 것 같았다. 정치 쇼를 하자고 사람을 내칠 수는 없다는 태도였다”라고 말했다.
▲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 문재인 후보의 열세로 나오자 민주당 당직자들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임준선 기자 |
다음은 그 사례 하나. 민주정책연구원이 마지막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는 지난 17일이었다. 4%포인트 차로 문 후보가 지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도 민주당에선 “우리 조사는 원래 좀 보수적으로 나온다. 가정주부와 자영업자들이 샘플에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라며 낙관론을 폈다. 설상가상으로 방송 3사의 17일 사전 조사에서 문 후보가 46.0%, 박근혜 후보가 44.6%로 나왔다는 얘기가 전해지자 민주당에선 “이미 역전에 성공했다. 100만 표 정도 표차로 이길 것 같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한 민주당 출입기자는 이에 대해 “전국에 지역위원회라는 막강한 조직을 두고 있는 민주당의 정보력과 그 판단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한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니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정보를 총괄하는 기획본부장이라는 사람(이목희 의원)이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황당한 반응을 내놓은 것 아니겠느냐. 정보가 없으니 거기에 맞는 전략이 제대로 있었을 리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후보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야권에선 항상 대선을 비롯한 주요 선거 때 ‘전략적 선택’이 화제가 됐다. 2002년 광주에서 시작된 노무현 바람이 대표적인 예다. 전략적 선택은 ‘우리 사람’이 아니라 ‘이길 사람’을 밀어주는 선택을 말한다. 당시 동교동계 주류는 이인제 후보를 밀다가 철저한 비주류였던 노무현으로 말을 갈아타는,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 대선에서 야권은 전략적 선택이 아닌, ‘우리 사람’을 내세워 패배를 자초했다. 당시 경선과정에서 비주류는 “친노그룹으로는 박근혜를 잡기 힘들 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 구도가 결코 유리할 게 없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주류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패퇴했다.
비노그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앞으로도 문제다. 지금 야권을 보면 국민참여경선을 통해서 후보를 배출할 수 있는 그룹이 친노그룹밖에 없다. 당권이든 대선후보든 친노그룹만이 이길 수 있다. 조직력이나 정치력 면에서 친노그룹이 가장 잘 훈련이 돼 있고 잘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노그룹은 본선에 내보내면 이기지 못한다. 문재인이 이걸 잘 보여줬다. 문재인은 친노그룹 치고는 이미지가 좋고, 전혀 싸가지 없거나 강성인 이미지도 아니다. 그런데도 본선에서 지지 않았나. 뭔가 큰 변화가 없다면 내부 경선에서 친노 인사가 당선이 돼서 본선에 나가서는 지고 마는 일이 또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친노그룹과 당의 완전 해체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게 민주당의 현주소다.
박공헌 언론인·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이정희 ‘안하무인’ 부글부글
▲ 민주당 일각에서는 1, 2차 TV토론에서 이정희 전 후보의 ‘싸가지 행보’가 대선을 망쳤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한편에선 ‘마녀사냥’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부정투표 논란 이후 민심에 역주행을 거듭하고 있는 이정희 전 후보의 ‘싸가지 행보’를 보면 일견 수긍이 가는 해석이기도 하다.
다음은 한 민주당 당직자의 전언.
“18일 저녁 때 도저히 빠질 수 없는 모임이 있어서 바쁜 와중에도 잠깐 참석했는데, 식당이 너무 시끄러워서 도저히 대화가 안 될 정도였다. 주인을 불러서 ‘오늘 왜 이러냐. 조용히 좀 시켜라’고 말했더니 주인 말이 ‘50대 손님들이 모임을 하고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 만든다고 으싸으싸 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실제로 그 중 일부는 계속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꼭 투표해라. 박근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여당 지지자들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50대가 야권에 엄청나게 열이 받았고, 그래서 생각지도 못했던 조직적 응징 투표에 나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의 증언도 있다.
“19일 낮에 집안 행사가 있어 참석했는데, 거기서 높은 투표율이 화제였다. 내가 ‘투표율이 이렇게 높은 걸로 봐서 문재인이 되겠다’고 했더니 집안 어른 중 한 명이 ‘무슨 소리냐’며 정색하더라. 그 양반 얘기가 ‘투표율 높으면 문재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지금 투표장 가 봐라.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다. 투표율 높으면 높을수록 박근혜와 문재인의 격차만 더 벌어질 거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나이 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문재인을 싫어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양반이 ‘문재인이 싫다기보다는 그쪽 놈들 하는 싸가지가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이정희 봐라. 남쪽 정부라고 하지를 않나. 정동영이는 또 노인폄하 발언을 하고. 또 어떤 놈들은 박근혜가 사이비 종교 믿는다고 하고 굿을 했다고도 하고. 그런 빨갱이놈들, 싸가지 없는 놈들한테 나라 맡길 수 있겠냐’고 했다. 거품을 물고 얘기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이런 반응들은 기자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앵그리 올드(angry old)의 반란’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응징 투표라고 볼 수도 있다. TV토론 과정에서 보여준 이정희의 안하무인적인 태도, 특히 최소한 고모뻘은 되는 박근혜 후보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 엄청난 반감을 불러온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기자의 한 지인은 “저런 근본 없는 똑똑함을 나라를 위해서 쓰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정희 전 후보의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산업화 세대로서 예의를 중시하는 중장년층에게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 전 후보의 박 후보 비방에 그들이 감정이입이 돼 ‘내가 이렇게 무시당해야 하는가’ 하는 자각이 집단행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대선은 ‘누가 잘하느냐를 뽑는’ 선택투표가 아니라 ‘누가 더 기분 나쁘게 했느냐’의 배제투표가 돼버렸다. 이에 대한 평가는 5년 뒤 박근혜 정부의 성적표에서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