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통합당 내 주류인 친노세력의 패거리 정치가 대선 패배의 주요인으로 떠올랐다. 사진은 문재인 전 후보. 사진제공=문재인 |
“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미약’하리라.”
욥기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딱 반대로 바꾼 말이다. 지금 민주통합당 내 주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친노세력이 현재 처한 상황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혜성처럼 등장한 친노세력은 정권 창출이라는 대업을 이뤘지만,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대선 패배의 장본인으로 떠올랐다.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통합당 내에서는 벌써부터 친노세력의 책임론 따지기가 한창이다. 당내 비노 인사들은 이번 기회에 주류인 친노세력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2선으로 퇴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친노세력에 있어서는 시련의 계절이 아닐 수 없다. 한때 한국 정치계의 대안 세력으로 떠올랐던 친노세력의 잔혹사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과연 문제는 뭐였을까.
노무현과 친노세력의 등장은 화려했다. 2030세대는 물론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인 486세대도 구태정치를 버리고 새 정치를 실현할 대안 세력으로 노무현과 친노세력을 선택했다. 민주통합당 쇄신파 안민석 의원은 “친노세력도 분명 애초 개혁을 바라는 순수한 열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돈 안 드는 선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개혁’ 등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2002년 대선 직전, ‘후단협’ 사태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2003년 헌정 이래 최초라는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겪은 친노세력은 점점 폐쇄적인 집단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정치컨설턴트 김대진 대표는 “노무현은 비주류 인사였다. 막상 권력을 잡으니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을 나와 열린우리당을 만든 것이다. 필요에 의해 모인 비주류 인사들은 현실에서 외부 주류 세력들을 상대하기 위해 안으로 결속하고 폐쇄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인 것이다”고 지적했다.
2004년 11월, 열린우리당에서는 당시 4대 입법안(‘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두고 비공개 마지막 의총이 열렸다. 다른 법안에 대한 협의는 대체로 마무리됐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야당(당시 한나라당)과의 협의를 위해 ‘대체입법’을 하자던 몇몇 비노 인사들과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다수 친노 인사들이 맞붙었던 것이다. 이때 ‘대체입법’을 두고 발언에 나선 비노 인사 배기선 의원에게 친노 핵심 인사였던 유시민 의원은 그 자리에서 발언을 막으며 “배기선 의원!, 당신이 언제부터 친노 행세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단협 가담 전력이 있었던 배기선 의원은 결국 얼굴을 붉히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이는 친노세력의 폐쇄적 집단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 한 예라 할 수 있다.
앞서의 김 대표는 “친노 세력은 ‘버림의 정치’를 행해 왔다. 자신의 바운더리에 들어오지 않으면 철저하게 배척한다. 기존의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패거리 정치’가 이미 자리 잡았다. 또 이러한 사고 속에서 이미 내 것이 오직 진리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듯하다. 그동안 많은 친노 인사들이 불법선거와 금품수수 등 구태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위를 자행했지만, 그들의 프레임 속에는 이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민주화와 정치 개혁의 주체자로 생각해왔다. 이게 현재 친노의 모습이다”고 지적했다.
친노 세력이 주축이었던 열린우리당은 2005년 4월 재보궐 선거 패배, 2006년 5월 지방선거 참패를 이어가며 쇠락해갔다. 그러고도 계속 당내 인사들이 집단 탈당을 거듭하는 이합집산 속에서 2007년, 대권을 고스란히 MB정부에 넘겼다. 친노 프레임의 한계가 처음으로 큰 선거에서 입증된 것이다. 이러한 책임론에도 불구하고 아이로니컬하게도 친노세력은 야권의 이합집산 속에서 당내 주축세력으로 떠올랐다. 민주화 세대의 완장만을 내세운 채 국민들의 의식수준과는 점점 동떨어져 갔지만 그들이 가진 선거 노하우와 조직관리의 힘 등으로 정치 결사체로서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하지만 당의 기득권을 장악했지, 더 이상 국민이 생각하는 정치개혁의 대안세력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MB정부 심판’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친노와 야권의 부활이 확실시됐던 지난 4·11총선에서의 예상 밖 참패와 이번 대선의 패배가 바로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한 야권 인사는 “결국 오만의 결과다. 친노세력 특유의 폐쇄적 정치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자신들의 주 지지층인 2030세대에 집중했지만 50대 유권자는 철저히 버린 결과다. 지금 50대 유권자들은 지난 2002년 노무현 정권 탄생의 주인공인 486세대들이다. 친노세력은 이 점을 놓쳤다. 무작정 높은 투표율만 보고 당선을 자신했던 우리의 모습이 우스울 뿐이다”며 자책했다.
한편으로는 친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재인 전 후보의 한계일 수 있다. 앞서의 김 대표는 “인간 문재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결국 문재인은 이해찬을 비롯한 친노세력이 세운 ‘아바타’격이었다. 몇몇 인사들을 제외하면 친노 핵심 세력 어느 누구도 정권 창출 이후 ‘임명직’을 맞지 않겠다는 결단조차 하지 않았다. 문재인 본인 역시 당 내에서 인사권 개입을 통한 쇄신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현재 민주통합당이 차지하고 있는 의석수는 정확히 128석이다. 적지 않은 수다. 이중 70% 이상은 친노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여전히 친노는 대한민국 제1 야당의 주축세력인 것이다. 지난 10년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친노세력은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현재 친노 세력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은 아마도 “죽어야 산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문, 안에 답례 안한 게 패인”
이번 대선 패배로 민주통합당 내에서는 선거책임론과 함께 ‘쇄신’과 ‘개혁’ 논쟁이 한창이다. 이 과정에서 당내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쇄신파 의원들의 목소리는 날로 커지고 있다. 특히 쇄신파 핵심인사인 3선 안민석 의원은 연일 ‘친노세력 책임론’을 강조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지난 12월 28일, 그를 만났다.
-이제 방금(12월 28일 오전) 원내 대표 투표를 하고 왔다. 비노 인사인 박기춘 의원이 선출됐다.
▲우리의 작전은 일단 신 의원과 박기춘 의원이 결선으로 갈 것으로 보고 3위의 김동철 의원(쇄신파)의 표를 결선에서 박 의원에게 몰아주는 것이었다. 어제 쇄신파 의원들과 오찬을 갖고 합의한 내용이다. 결국 우리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냈다.
-이번 대선 패배를 두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당이 쇄신과 변화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거다. 개인적으로 인간 문재인은 내가 10년 가까이 의정활동하면서 본 정치인들 중 가장 사심이 없고 귀가 큰(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정치인이다. 하지만 친노 세력의 ‘기득권 버리기’가 관철되지 못했다. 내가 대선 끝나고 처음 말하는데, 진짜 아쉬운 대목 하나가 있다.
-뭔가. 대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나.
▲문재인 전 후보의 마지막 광화문 유세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문 전 후보는 안철수 전 후보에게 목도리를 선물 받았다. 문 전 후보는 안 전 후보에게 그에 대한 답례를 했어야 했다. 문 후보는 대선일을 앞두고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는 차원에서 “내가 국회의원을 사퇴하겠다. 이건 내가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첫 번째 선물이다. 그리고 안 후보의 선물의 화답으로 그 지역구를 안 후보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직접 문 전 후보에게 제안한 내용인가.
▲직접은 아니지만, 내가 문 전 후보 캠프 핵심인사를 통해 전달한 내용이다. 만약 그대로 실행했다면 기득권을 포기하면서도 안철수 세력을 껴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정희 막말 논란, 아이패드 사건, 국정원 여직원 사건 등 궁지에 몰렸던 민주당으로서는 한 방에 잠재울 수 있는 카드였다.
-친노세력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뭐라 보는가.
▲난 ‘친노’와 ‘친노 패권세력’을 구분한다. 나도 친노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바랐던 노무현 정신은 나도 존경하고 계승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기네들끼리 당직 다 나눠먹고, 거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배제하고, 인정도 안 해 주고 그런 문화가 문제다. 친노 정신을 배척한 일부 친노 패권주의 세력이 문제인 것이다. 그 분들이 지난 총선과 이번 대선을 망친 것이고 이제 2014년 지방선거도 망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원내 대표 경선에서도 엄한 사람(신계륜 의원)을 내세워서 옷만 바꿔 입고 기득권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안철수 전 후보와의 향후 관계설정도 중요하지 않나.
▲안철수 전 후보는 타이밍 정치에 능한 분이다. 결국 우리 하기에 달려 있다. 안 전 후보는 우리가 쇄신을 잘 이행하면 빨리 합류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우리가 쇄신을 지지부진하면 내년 재보궐과 지방선거에서 쫄딱 망하고 나서야 한국에 올 수도 있다. 새 정치라는 그릇을 크게 하고 우리 기득권 다 버리고 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죽어야 사는 셈이다.
-여전히 친노세력은 야권 주류다. 비주류인 쇄신파로서 한계가 있지 않나.
▲바닷물에 음식이 썩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아나. 2% 섞인 소금 때문이다. 당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소금 역할을 할 것이다. 공정한 룰만 보장된다면 비주류인 우리가 당내 주류로 옮겨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제 더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