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딱 5년 만의 귀환이다. 2020년, 중국의 커제 9단을 꺾고 생애 첫 세계 타이틀을 품에 안았던 바로 그 무대. ‘LG배의 사나이’ 신민준 9단(26)이 다시 한 번 LG배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일본 바둑의 자존심이자 현 응씨배 챔피언인 이치리키 료 9단(28). 이로써 세계 메이저 바둑대회 결승에서 21년 만에 역사적인 한일전이 성사되며 전 세계 바둑 팬들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다.
신민준 9단(왼쪽)과 일본 이치리키 료 9단이 LG배 사상 두 번째로 한일 결승전을 갖게 됐다. 사진=한국기원 제공#“집중력의 차이가 승부 갈랐다”
지난 8월 6일, 서울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30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준결승전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25회 대회 우승자 신민준 9단은 대만의 강자 쉬하오훙 9단을 상대로 초반 우변에서 치명적인 사활 착각을 범하며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지켜보던 해설자들마저 탄식을 내뱉는 절망적인 형세.
신민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벼랑 끝에서 하변 전투의 실마리를 찾아냈고, 승리를 눈앞에 뒀던 상대가 마지막 결정타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자 이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기적 같은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하며 218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 바둑을 지켜본 백홍석 9단은 “집중력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고 총평했다. 백 9단은 “신민준 9단이 초반 큰 실수로 불리했지만 끈질기게 추격했다. 반면 우세하던 쉬하오훙 9단은 단 한 번의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고, 신 9단이 그 틈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같은 시간, 다른 반상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변상일 9단이 일본의 이치리키 료 9단에게 고배를 마셨다. 이치리키 료 9단은 중반 변 9단의 대마를 통째로 잡아내는 완벽한 수읽기를 선보이며 124수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LG배 역사상 최초의 2연패 도전은 4강에서 멈췄고, 결승 대진은 신민준 대 이치리키 료의 한일전으로 최종 확정됐다.
신민준 9단(왼쪽)이 대만 일인자 쉬하오훙 9단을 꺾고 25회 대회 이후 두 번째 LG배 정상에 도전한다. 사진=한국기원 제공#우승 상금 3억 원 잡아라!
세계 메이저 대회 결승에서 한국과 일본 기사가 만나는 것은 2004년 지금은 없어진 일본 주최 후지쓰배에서 박영훈 9단과 요다 노리모토 9단이 맞붙은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LG배로 한정하면 1998년 제2회 대회에서 유창혁 9단이 대만 출신의 일본기원 소속 왕리청 9단과 대결한 이후 무려 28년 만이다.
5년 만에 다시 찾아온 기회에 신민준 9단은 “초반에 많이 안 좋게 시작했는데 운 좋게 이겼다. 우승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지났다니…. 오랜만에 결승에 올라 정말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결승 상대인 이치리키 료 9단에 대해서는 “최근 세계대회 성적이 워낙 좋은 강자다. 특히 힘이 좋고 승부처에서의 집중력이 뛰어나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대지만, 결승까지 남은 기간 동안 잘 준비해 만만치 않은 승부를 만들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이에 맞서는 이치리키 료 9단 역시 자신감에 차 있다. 그는 “세계대회 결승 진출은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다. 이 기회를 반드시 살리고 싶다”면서 “신민준 9단은 오랫동안 최정상급 기량을 보여준, 모든 면에서 강한 기사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두 기사의 공식 맞대결은 2020년 삼성화재배 16강전이 유일하며, 당시에는 이치리키 료 9단이 승리한 바 있다.
역사적인 서른 번째 LG배 우승컵의 향방을 가를 결승 3번기는 내년 1월 19일부터 시작된다. 5년 만에 왕좌 탈환을 노리는 신민준과 응씨배 석권에 이어 메이저 2관왕을 꿈꾸는 일본 최강 이치리키 료. 3억 원의 우승 상금을 놓고 펼쳐질 두 기사의 양보 없는 승부에 벌써부터 귀추가 주목된다.
[승부처 돋보기] 제30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준결승전
흑 쉬하오훙 9단(대만) 백 신민준 9단(한국) 218수 끝, 백 불계승
장면도[장면도] 타개의 맥점은?
우변 백 6점이 흑의 수중에 떨어져서는 집으로 제법 차이가 나는 국면이다. 백은 이제 아래 흑▲ 3점과 중앙 흑■를 엮어 최소 하나는 제대로 공략해야 승부가 가능한 장면. 자, 여기서 흑의 타개 맥점은 어디일까.
정해도[정해도] 일류의 감각
흑1의 붙임이 대만 일인자다운 일류의 감각. 여기서 백2로 차단하는 건 욕심이다. 흑3의 씌움이 예리한 반격으로 흑7까지 거꾸로 중앙 백이 위험하다.
변화도[변화도] 준비된 필살기
그러므로 백도 2의 젖힘이 최강의 반발이지만, 그러면 흑3의 이단젖힘이 행마의 리듬을 구하는 좋은 수. 백은 4의 단수밖에 보이지 않은데 그때 흑5가 진작 준비된 필살기다. 이어 백6을 기다려 흑7이 백 전체를 공략하는 맥점이며, 흑13이 마지막 피니시블로.
실전진행[실전진행] ‘목을 씻고 기다리는’ 수
성립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던진 백1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담긴 이른바 ‘목을 씻고 기다리는’ 수였다. 하지만 흑2로 인해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된다. 변화도대로라면 백이 돌을 거둬야 했지만, 백3부터 9까지 반격이 이어지자 오히려 위아래 흑돌 전체가 위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