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만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 변호사 시절 맡았던 부동산 소송 건과 관련해 구설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
2009년경 망자가 남긴 수십억 원 대의 유산을 받아 든 유족들은 깜짝 놀랐다. 고인 신 씨가 남긴 유산을 상속하기 무섭게 국세청으로부터 ‘고인 신 씨가 미납입한 매도 관련 세금을 유족들이 대신 내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국세청이 언급한 매도 건은 바로 신 씨가 지난 2006년 2월 재개발조합 측 박만 변호사와 협의 조정해 30억 원대에 양도한 바 있는 상가를 뜻한다.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문제의 이 상가는 2004년경 재개발조합 측에서 무단 철거했고 이에 분개한 신 씨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물건이다. 결국 조합 측과 2년간 소송 끝에 신 씨는 2006년 5월경 조합 측에 토지대금 형식으로 상가 부지를 19억 원에 양도하기로 협의했다. 신 씨는 이때 국세청에 19억 원에 해당하는 양도소득세를 신고 납부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신 씨가 관광 차 찾았던 예멘에서 돌연 ‘변’을 당하면서 이 물건에 대한 진실공방이 뒤늦게 시작됐다. 서울국세청이 유산을 물려받게 된 신 씨의 유족들에게 상속세를 추징하는 과정에서 ‘신 씨가 문제의 물건을 19억 원이 아니라 38억 원에 조합원 측에 양도했다’는 정황을 밝혀낸 것이다.
한마디로 신 씨가 생전에 벌인 양도 건과 관련 조합 측과 화해 조정하는 과정에서 19억 원에 해당하는 이면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이 나온 것이다. 이에 강동세무서장은 유족 측에 “고인이 19억 원을 더 받았으니 이에 해당하는 세금 9억여 원을 더 내라”고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졸지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게 생긴 유족은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에 놓였다. 이와 관련 신 씨의 한 유족은 “신 씨의 업무를 담당한 모 변호사를 통해 신 씨가 생전 체결한 문서, 장부, 거래내역을 조사했더니 19억 원 이외에 돈을 더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국세청의 주장처럼 19억 원이 아니라 13억 원만을 추가로 받았을 뿐 나머지 6억 원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 부분(6억 원)에 대한 과세 처분은 취소돼야 한다”면서 “사라진 6억 원의 행방을 알 길이 없다. 결국은 합의를 조정했고 조합 측을 대리했던 박만 변호사와 그의 사무장 서 아무개 씨에게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유족 측이 확인한 결과 계좌 등 추적 가능한 금융거래 내역을 통해 신 씨에게 흘러 들어간 돈은 총 32억 원, 그러나 당시 조합 측이 시공사인 현대건설에 ‘신 씨의 상가지분 매입금으로 38억 원이 필요하니 대여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던 점, 해당 시공사 측이 2006년 3월 16일 박만 변호사의 계좌로 3차례에 걸쳐 실제로 38억 원을 송금했던 것이 밝혀지며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됐다.
이에 대해 유족 측은 신 씨가 사망하기 5개월 전인 2008년 8월 서울강동서 측과의 진술조사에서 “2006년 4월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상가를 재건축조합 측 박만 변호사(현재 방통위심의위원장)와 2년간 조정 끝에 ‘32억 원에 매도한다’는 매매계약서를 체결했다”고 밝힌 녹취자료에 근거해 “사라진 6억 원의 행방을 박 위원장이 속 시원히 밝혀줘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나선 상태다.
그러나 당시 박만 변호사 측 사무장 서 아무개 씨의 주장은 신 씨가 생전에 남긴 진술 내용과 각을 달리하고 있다. 사무장 서 씨가 박만 변호사를 대리해 신 씨와 작성했다는 합의서가 새로운 증거로 떠오르면서 박 위원장의 무고함에 힘이 실린 것이다. 이 합의서에 따르면 △부동산 대금은 총 37억 원(토지대금 19억 원, 손해배상금 13억 원, 소송비용 5억 원)으로 할 것 △박만 변호사는 37억 원을 2006년 4월 12일 신 씨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지급할 것 △서 사무장에게 수고비로 1억 원 지급할 것 △대외적으로는 합계 32억 원(토지대금 19억 원 및 손해배상금 13억 원)에 합의할 것으로 적시됐다. 이 과정에서 38억 원 중 6억 원이 현금으로 신 씨에게 건네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박만 위원장 측과 국세청의 본래 주장대로 신 씨가 조합 측으로부터 38억 원을 지급받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인 셈이다. 행방불명된 줄 알았던 6억 원의 실체가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이 합의서가 드러나는 바람에 박 위원장의 무고 여부를 굳이 따질 근거는 법적으론 없는 상황이 됐다. 신 씨가 인감도장을 찍은 합의서 등 여러 증거를 포함해 따져보면 법적인 측면에서 박 위원장은 이미 무고한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박 위원장은 “38억 원을 신 씨에게 양도하는 과정을 일체 서 사무장에게 위임해 대리케 했으니 구체적인 내용은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하며 시종일관 사건 자체에서 발을 빼는 태도를 취해왔다.
서 사무장 역시 “나 혼자 했다”는 내용의 주장을 해 박 위원장을 보호하는 모양새다. 더군다나 서 사무장은 신 씨의 사건을 처리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만 위원장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옷을 벗고 나왔다.
이에 대해 신 씨의 유족 측은 “신 씨가 죽었으니 조합 측 박만 변호사가 사무장과 짜고 허위 합의서를 만들어 6억 원을 턴 거다”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어 유족 측은 “합의서를 전문 사설기관에 의뢰한 결과 합의서에 찍힌 신 씨의 인감 날인이 위조됐다는 판정을 받았다”면서 “서 사무장이 신 씨에게 실제로 6억 원을 현금으로 건넸다면 현금 출처와 관련 출금 내역 등 장부를 속 시원하게 공개하면 그만인데 왜 끝까지 숨기는지 모르겠다. 석연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 유족은 “답답한 마음에 서 사무장에게 장부 얘기를 꺼내자 되레 ‘죽은 사람에게 물어보라’며 히죽 웃더라”라고 말했다.
유족 측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 중에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유족 측 원 아무개 씨가 2년 전 박만 변호사 사무실에 처음 찾아가 망자인 신 씨의 이름을 대자 박 위원장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도 사무장에게 당했다”면서 급히 해명하는 모양새를 보여 더 수상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에 의문을 품은 유족들은 정황 증거 등을 토대로 중앙지검에 박 위원장 측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고 한다. 유족 측 원 씨는 “박만이 누군지 아느냐,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 하느냐”는 상대방의 엄포에 “존함이 어떻게 되느냐, 녹음하겠다”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에 의문의 상대방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원 씨는 “나중에 번호를 추적했더니 자신의 정보를 감추기 위해서인지 중앙지검 내 공실을 이동하면서 전화한 것이었다. 통화 내역 보면 중앙지검 측 번호가 다 나와 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유족 측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바 있는 국세청 김 아무개 국장도 유족 측과 사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변호사 사무실에서 6억 원에 달하는 현금을 시종일관 보유하고 있다가 신 씨에게 갑자기 전달할 수 있나. 멀쩡히 38억 원을 계좌로 받아놓고 거기서 출금해서 주면 그만인데. 내가 봐도 비상식적이긴 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국장은 “박 변호사님께선 유명 검사 출신으로 원래 법무부 장관에 임용되실 뻔한 분이었다. 소송을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까지 해줬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법조인은 “담당 변호사 몰래 사무장이 단독으로 그런 막중한 일을 했다는 게 나 역시도 이해가 안 간다”면서도 “무엇보다도 법적으로 박만 위원장이 잘못된 사실은 전혀 없다. 더군다나 사무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박 위원장의 처지도 억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박 위원장이 이 사건에 결정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어 유족들도 박 위원장을 상대로 소송 제기를 할 수 없는 상태다. 더군다나 신 씨 측은 지난 2011년 서 사무장을 상대로 낸 1심 소송에서 패소를 당하기도 했다. 아직까진 유족 측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기자가 직접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박 위원장에게 “신 씨 관련 소송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답을 전해 듣지 못했다.
하지만 유명 검사 출신으로 고위 공직에 오른 박 위원장은 윤리적 책임의 잣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된 건 사실이다. 재임 전에 벌어진 사소한 구설수에도 흔들릴 수 있는 게 그간의 고위 공직자들의 행보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베테랑 법조인으로서 본인이 수임한 사건과 관련해 사무장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도의적 책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면치 못하게 됐다.
망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6억 원을 둘러싼 진실게임의 결말은 현재 고등법원에서 진행 중인 2심에서나 접할 수 있게 됐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