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쌓일수록 피해액은 증가

미국 법무부는 10월 14일 금융사기와 자금 세탁 등의 혐의로 천 회장을 기소했으며, 천 회장의 소유로 드러난 비트코인 150억 달러(약 20조 5000억 원)를 압류하고 몰수 조치했다. 미국 재무부는 프린스 그룹을 ‘초국가적 범죄 조직’으로 공식 지정하고, 그룹과 관련된 개인 및 법인 146곳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정부가 캄보디아 스캠(사기) 산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을 1000명 규모로 추산 중인 가운데, 국내 피해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로맨스 스캠과 보이스피싱, 투자 리딩방 사기 등 온라인 사기 피해액은 1조 원을 넘어섰다. ‘일요신문i’는 국내 피해자들을 만나 치밀한 돼지 도살 범행 수법에 대해 알아봤다. 실제로 미국 검찰이 분석한 ‘SNS 연락, 신뢰 구축, 투자 설득, 연락 두절’의 4단계가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30대 여성 A 씨는 2024년 8월 한 채팅 앱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중국인 B 씨에게 ‘회귀자원’ 투자를 제안 받았다. 해당 앱 이용자들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과 소통·교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B 씨는 A 씨에게 ‘WI harper’라는 사이트를 소개하며 “여기서 회귀자원에 투자하면 고수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A 씨는 같은 달 27일 66여만 원을 시작으로 2024년 10월 2일까지 총 2억 7000여 만 원을 투자했다.
해당 사이트가 보여주는 수익률은 A 씨를 혹하게 했다. A 씨는 B 씨의 주문에 따라 지시하는 종목을 클릭한 뒤 180초 또는 240초를 기다리면 투자 수익금이 10%, 15%, 20% 등 점점 불어났다. A 씨는 “당시 박스피에만 갇혀 있던 코스피만 보다가 놀라운 수익률과 투자금 소액 인출까지 경험하니 그를 ‘중국의 워렌버핏’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해당 사이트에 명시된 A 씨의 투자 수익금은 총 8억 원에 육박했다.
이후 B 씨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24년 10월쯤 B 씨는 “다국적 기업이라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면서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 수준의 금액을 요구하며 A 씨를 압박했다. A 씨가 돈이 없다고 하자 B 씨는 세금 납부를 위해 인터넷은행 대출까지 받으라고 종용했다. 이후 B 씨는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은 채 잠적했다. A 씨는 “채팅 중 ‘Eat more and turn into my little fat pig(더 먹고 내 작은 뚱뚱한 돼지로 변하세요)’라는 언급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돼지(피해자)를 도살하기 전 ‘살 찌우기’ 과정을 설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10월 8일쯤 A 씨는 피해 사실을 인지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결론적으로 10년 동안 모은 전 재산 2억 7000여 만 원을 모두 잃었다. ‘일요신문i’ 확인 결과 A 씨가 투자금을 입금한 사이트는 피해자들을 현혹하기 위해 2024년 6월 개설된 가상 사이트로 파악됐다. 이곳에서는 자신들의 투자 기법이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연구되고 있고, 글로벌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고 홍보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또 다른 돼지 도살 피해자 C 씨는 대학생 시절부터 약 10년 동안 신문 배달과 청소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모은 1억 원을 잃었다. C 씨는 2024년 11월 성소수자 전용 채팅 앱에서 알게 된 D 씨에게 비트코인 선물 투자에 관한 내용을 들었다. D 씨는 하루에 500만 원 수익을 냈다는 캡쳐본을 보여주면서 C 씨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D 씨의 범행 방식은 암호화폐 이동을 이용한 방식이었다. C 씨가 국내 거래소에서 USDT(테더) 코인을 구매한 뒤 이를 해외 거래소 지갑으로 이체하게 한다. 이후 D 씨가 알려준 거래소에 입금하면 D 씨가 선물 투자한다고 속여 가로채는 것이다. D 씨가 소개한 거래소는 아일랜드에 본사를 둔 해외 거래소를 사칭한 가짜 거래소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C 씨는 시험 삼아 50만 원을 투자했으나 신뢰를 쌓은 D 씨는 점차 큰 금액을 투입하게 만들었다. D 씨는 가짜 거래소에 입금액 7000만 원을 채우면 1000만 원의 보너스를 준다고 속였으며 C 씨는 이를 믿고 모든 자금을 송금했다. 이후 C 씨가 출금을 시도하자 D 씨는 3000만 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고 안내했고, C 씨는 대출을 통해 세금 명목으로 추가 송금했다.
계속 돈을 요구하는 점을 의심스럽게 여긴 C 씨는 D 씨에게 답변을 요구했지만 D 씨는 “아버지가 간암에 걸렸다”는 이유로 연락이 뜸해졌다. 이후 연락이 닿지 않자 C 씨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에서는 수사 끝에 C 씨 사건을 미제 종결 처리했다.

피해자들은 돼지 도살에 당한 뒤 금전 피해뿐 아니라 정신적 트라우마를 감내해야 했다. A 씨는 “사건 직후 투자를 했던 장소에 머무는 것조차 두려워 벌벌 떨었다. 매일 밤 투자 사이트가 꿈에 나오는 악몽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결국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심리적 충격이 심각했고, 1년이 지난 현재는 많이 나아졌지만 더 이상 사람을 못 믿겠다”고 말했다. 이어 “불과 3개월 만에 저의 10년이 사라졌다”면서 “10년의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한 허탈감과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범죄의 충격이 오래 가는 이유는 돼지 도살 스캐머들과 깊은 친밀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A 씨는 “돼지 도살 스캠을 접하지 않은 분이라면 왜 피해를 입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B 씨는 중국 남자 특유의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밥 먹을 때와 일할 때, 잠잘 때, 일어날 때 등 거의 매 순간 메시지를 보냈다. 게다가 첫 대화 때 피해자의 직업을 묻고 이에 맞는 시나리오를 구성한다. 음식 취향까지 비슷하게 설정해 ‘이런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나와 가치관이 정말 닮아 있네!’라고 생각하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A 씨에 따르면 돼지 도살 스캐머 B 씨는 선한 성격과 중국 고아원에 매주 기부를 하는 기업체 사장으로 비쳤다. B 씨는 처음 대화할 당시 정신적 고립감을 느끼던 A 씨에게 많은 위로를 건네 A 씨가 의지할 대상이 됐다. 피해자와 유대감을 쌓은 B 씨는 좋은 말과 함께 투자금을 늘릴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A 씨는 이를 승낙했다.
A 씨는 자신이 ‘운이 좋은’ 피해자라고 말한다. 지난 4월 24일 국내 범죄 자금 세탁 총책 한 아무개 씨가 검거됐고, 이에 따라 A 씨의 피해 금원이 흘러 들어간 계좌 2개가 한 씨의 범행과 연관돼 사건이 검찰에 넘겨진 것이다. 한 씨는 유령법인을 설립하고 상품권 거래를 가장해 439억 원에 달하는 범죄수익을 세탁한 혐의를 받는다.
10월 2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제1형사부(김용규·김준영·김은영 판사)는 전기통신금융사기피해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위반,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한 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다만 재판부는 “민사소송 절차가 타당하다고 판단한다”며 A 씨의 배상 명령 신청을 각하했다.
재판 결과가 나온 뒤 A 씨는 “어쨌든 8년이라는 말을 들으니 속이 후련했다”면서 “비록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앞으로 민사소송을 이어가야 하지만, 재판에 간 것도 스캠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한 씨와 같은 소속 조직원들은 현재 검찰로부터 최대 징역 10년을 구형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자들은 돼지 도살 사기 처벌을 강화하는 동시에 즉각적인 계좌 지급정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A 씨는 “전기통신 금융사기 피의자 처벌 수위가 높아졌으면 좋겠다”면서 “피의자가 검거돼도 실제 범죄수익금은 테더 등 가상 자산으로 바뀌어 해외 총책에 송금돼 실제로 범죄수익금 추징이나 피해 회복이 희박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가상 자산으로 이동된 피해 송금액을 피해자가 환급받는 절차나 제도도 생겨났으면 좋겠다”면서 “보이스피싱뿐 아니라 투자 리딩방, 돼지 도살 스캠 등에도 즉각적인 계좌 지급정지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전문가들은 기술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 투 트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돼지 도살 사기는 딥페이크나 인공지능(AI)을 범죄 목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딥페이크를 감지해 실시간 경고를 해준다든가, 사기적 언어를 걸러내는 대화 필터링 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기술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웅혁 교수는 이어 “정서적 고립감을 파고드는 로맨스 스캠류 범죄에 대응하려면 개인이 범죄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특히 돼지 도살 스캐머들은 피해자 특징을 분석해 맞춤형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개인정보 보안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