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의원총회. 중구난방으로 터져나오는 주장으로 당 쇄신 방안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제1야당의 의원총회인지 TV 개그 프로그램의 <봉숭아 학당>인지….”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보좌진들 사이에서 최고참급에 속하는 A 씨는 지난 17일 당 의원총회를 지켜 본 뒤 혀를 끌끌 차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의총은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들어선 뒤 처음으로 민주당 의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 당면한 국회 현안은 물론 당 쇄신 방안 등에 대해 허심탄회한 토론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됐었다. 하지만 A 씨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이날 의총에선 상당히 생뚱맞은 이슈들이 쟁점으로 부각됐다. 대선 패배의 충격을 딛고 새 출발을 준비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토론장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첫번째 쟁점은 이른바 ‘회초리 투어’였다. 문희상 위원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최근 당내에서 제기된 ‘회초리 투어’에 대한 비판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문 위원장은 “(대선 패배로) ‘멘붕’이 된 분들에게 가서 같이 울고 반성과 참회를 안 하면 누가 우리의 진정성을 믿어주겠느냐”며 “어떤 사람은 이걸 ‘쇼’라고 했는데 이제 70∼80대가 된, 당을 처음부터 만들었고 이름을 부르기도 외람된 권노갑, 김원기, 임채정 이런 분들 다 나와 무릎 꿇고 절을 하는데 ‘쇼’라고 하면 그 사람은 어느 당 사람이냐”고 말했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와 김영환·정청래 의원 등이 ‘회초리 투어’를 두고 ‘쇼’라고 비판한 것을 정면으로 받아친 것이다.
박 전 원내대표는 “전국을 다니면서 잘못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혁신의 길로 들어가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반대 의사를 밝혔다. 김 의원은 “무엇을 반성하고 사과하는지, 누가 책임이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자칫 퍼포먼스로 비쳐질 수 있다”고 했고, 정 의원은 좀 더 노골적으로 “‘이벤트성 쇼’가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반복돼 왔다”고 비난했다.
결국 이날 의총에서 민주당은 18일 충청지역 방문을 끝으로 ‘회초리 투어’를 그만두기로 했다. 전국을 돌며 사과하고 절망에 빠진 지지층을 달래겠다며 시작한 ‘회초리 투어’를 불과 3차례 만에 끝내게 된 것이다.
이날 의총의 또 다른 쟁점은 당내 의원들의 종합편성채널 출연 여부였다. 박 전 원내대표와 은수미 의원이 박기춘 원내대표를 향해 종편 출연을 사실상 금지시킨 당론이 여전히 유효한지 물은 게 발단이었다. 이 사안은 지난 11일 의총 때부터 논란이 됐다.
당시 장병완 의원은 “대선 기간에 종편에 출연한 의원들이 여럿 되는데 이들에 대한 제재가 없었다. 유명무실해진 당론을 재논의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재정 의원도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졌음에도 민주당이 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는지 살펴봐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상당수의 의원들이 종편에 출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이날 의총에서 종편 출연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원내 지도부는 종편 출연을 금지시킨 당론을 폐지하려 했지만 상당수의 의원들이 “자존심도 없는 백기투항” “편파방송에 들러리를 서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원내 관계자는 “외부 용역을 통해 종편 출연 금지가 대선 패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 봐야 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분석이 가능할지도 불분명하지만 방송 출연 여부를 외부 용역까지 해 가며 결정하겠다는 발상은 당내에서 비웃음을 사고 있다.
이처럼 민주당 쇄신 논의가 제대로 된 진척 없이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는 불만 제기와 주장 속에 표류하는 상황은 많은 민주당 안팎의 인사들에게 또 한번 좌절로 다가가고 있다. 한 고참 보좌관은 “사과하러 돌아다니면서 절을 하든 안하든, 종편에 의원들이 출연을 하든 안하든, 그게 민주당 의총에서 토론돼야 할 사안이냐”며 “도저히 질 수도 없고, 져서도 안 되는 대선에서 패해놓고도 이렇게 비본질적인 사안을 둘러싸고 치고받고 싸운다면 민주당에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보좌관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다 계파 싸움 때문”이라며 “모든 사안을 친노(친노무현)냐, 비노냐의 관점에서 바라보다 보니 건설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싸움만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당료 출신의 한 정치평론가는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을 떠나게 된 일부 출입기자들과의 환송 술자리에서 “1년 전 비상대책위원회를 띄웠던 새누리당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민주당 비대위 체제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인지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거칠게 비판했다. 1년 전 한나라당이 4·11 총선 패배가 확실시되자 박근혜 현 대통령 당선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세우고 치열하게 변화의 몸부림을 쳤던 것에서 배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 평론가는 “민주당은 ‘정치쇼’라고 비웃었지만 비상대권을 쥔 박 당선인은 당명과 당 색깔, 당 로고까지 다 바꾸고 김종인 전 의원과 이상돈 중앙대 교수 등 이질적인 세력, 이준석 씨 같은 젊은층까지 끌어들였다”며 “‘정치쇼’라고 해도 이런 변신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새누리당이 집권에 성공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민주당은 문희상 비대위원장 체제 출범 6일 만인 지난 18일 대선평가위원회 등 3개 위원회 위원장단을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대선 평가와 전당대회 준비에 착수했다. 대선평가위원장에는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정치혁신위원장에는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가 각각 임명됐다. 한 교수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민주당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원로 학자이고, 정 교수는 시민운동 시절부터 강도 높은 정치개혁을 주장해 온 인물이다. 비대위 체제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업무를 당내 인사가 아닌 외부 인사에게 맡긴 것이다. 문 위원장이 뼛속까지 바꾸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비대위 출범 후 민주당은 문 위원장 개인이 쇄신의지로 충만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당이 해묵은 계파 갈등에서 벗어나 ‘한 번 제대로 바꿔 보자’고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한 어떤 변화의 노력도 실패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