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두 살의 박정환 9단에게 이번 결승 진출은 단순한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2021년 삼성화재배 우승 이후 4년 가까이 메이저 세계대회 정상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 사이 신진서 독주 시대가 열렸고, 중국의 젊은 기사들이 거세게 치고 올라왔다. 박정환 스스로도 “나이도 찼고, 이제 세계대회 우승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라고 자책하던 시기였다.
특히 지난해 춘란배 결승전 역전패는 그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다 이겼다고 생각한 바둑을 놓친 후, 그는 한 달 동안 괴로움 속에 아픔을 곱씹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 헬스장을 찾았고, 1년 사이 8kg의 몸무게를 늘리며 벌크업에 성공했다. 비록 본인은 늘어난 뱃살을 걱정하며 웃어 보였지만, 그 단단해진 체구는 곧 바둑판 위의 끈기로 치환됐다.
지난 12월 29일 열린 준결승전에서 박정환은 중국의 당이페이 9단을 상대로 314수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2집반승을 거뒀다. 당이페이는 이 대회 직전 열렸던 란커배 결승에서 신진서를 꺾고 우승컵을 안았던 강자. 박정환은 초반 우세를 점하고도 중반 패싸움 과정에서 흔들리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끝내 냉정함을 되찾아 승리를 확정 지었다. 박정환은 “32강 때만 해도 결승은 생각도 못했다. 그저 매 판 최선을 다해 즐겁게 두자는 마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며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
박정환의 이번 결승행이 더욱 놀라운 점은 그의 바둑이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민표 국가대표 감독은 최근 박정환의 기풍이 과거의 실리 위주에서 보다 두텁고 공격적인 스타일로 변모했다고 평가한다. 박정환 본인은 “의도한 변화는 아니지만, 상대들이 나의 수비적인 면을 공략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터운 흐름이 만들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진화의 배경에는 지독할 정도의 공부량이 있다. 그는 결승 진출을 확정지은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인공지능(AI)을 “여자 친구처럼 생각하며 온종일 끼고 산다”고 말했다. 잠들기 전까지 태블릿PC로 세상 모든 사이트의 새로운 사활 문제들을 풀며 성취감을 느낀다는 그는, 이미 세상의 모든 사활 문제를 다 풀었을 것이라는 주변의 추측에도 “아직도 새로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나온다”며 눈을 반짝였다.

결승 상대인 중국의 왕싱하오 9단은 박정환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다. 약 5년 전 왕싱하오가 중국 내에서도 무명이던 시절, 박정환은 그와 수백 판의 인터넷 대국을 두며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당시 한국 국가대표 코칭스태프가 “왜 이름도 없는 중국 신예와 귀한 시간을 허비하느냐, 차라리 국내 신예를 챙기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박정환은 어린 왕싱하오의 비범한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사실상 박정환이 키운 제자나 다름없는 왕싱하오는 이제 훌쩍 성장해 스승의 앞길을 막아서며 청출어람을 외치고 있다. 왕싱하오는 이번 대회 8강에서 현 세계랭킹 1위 신진서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진출 후 왕싱하오는 “박정환 9단은 (11세의)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세계 최정상급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다”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공식대국 전적은 박정환이 1승 2패로 살짝 밀린다. 박정환은 “왕싱하오는 수읽기가 빠르고 전투가 강한 기사였는데, 이제는 약점까지 보완해 정말 완벽해졌다”고 인정하면서도 “이젠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내가 다시 얻은 이 결승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제1회 신한은행 세계기선전 결승3번기는 2월 25일부터 서울 신한은행 본점에서 열린다. 이번 대회는 기본 30분에 매수 20초가 추가되는 피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박정환은 “시간 관리가 정말 어려운 기전”이라며 철저한 준비를 다짐했다.
지난해 한국 바둑은 세계대회에서 중국과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LG배와 난양배, 쏘팔코사놀은 한국이 가져왔으나, 춘란배와 란커배는 중국에 내줬다. 팽팽한 한·중 대결의 균형추를 깨고 초대 ‘기선’의 명예를 거머쥐는 쪽은 누가 될 것인지 궁금하다.
유경춘 객원기자 master@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