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일 슈퍼대항전의 영웅, 대륙의 자부심
녜웨이핑 9단이 중국에서 단순한 바둑 기사 이상의 성인(聖人)으로 대접받는 이유는 1980년대 그가 보여준 불멸의 활약상 때문이다. 당시 일본 바둑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중국 바둑계는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고, 이는 곧 국가적 자존심의 상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5년 시작된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녜웨이핑은 이 모든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현 농심배와 같이 이긴 사람이 상대를 바꿔가며 계속 싸우는 승발전 방식으로 진행된 대회에서 그는 중국의 최후 보루인 주장으로 나서 일본의 초일류 기사들인 고바야시 고이치, 가토 마사오,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을 연파하며 중국에 기적 같은 우승을 안겼다. 특히 1회부터 3회 대회까지 거둔 11연승은 ‘철의 수문장’이라는 명성을 그에게 선사했다.

리 기자는 녜웨이핑을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마라도나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꺾고 포클랜드 전쟁 패배로 인해 실의에 빠진 아르헨티나 국민을 위로해준 것처럼, 녜웨이핑 역시 바둑판 위에서 일본을 제압하며 중국인들의 꺾인 기개를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바둑을 모르는 학생들조차 라디오 앞에 모여 그의 승전보에 환호했고, 그가 캠퍼스를 방문할 때면 몰려든 인파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해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위상은 정치권과의 인연으로도 이어졌다. 현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과는 학창 시절부터 바둑과 축구를 함께 즐기며 우정을 쌓은 절친 사이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문화대혁명 시기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으며 공감대를 형성했고, 시 주석은 공식 석상에서도 녜웨이핑을 중국 문화의 대표 인물로 높이 평가해왔다. 이러한 녜웨이핑의 존재감 덕분에 중국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조사에서 바둑 기사가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중국 내 바둑 열풍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한국 바둑 팬들에게 녜웨이핑 9단은 1989년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조훈현 9단과 우승컵을 다퉜던 인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당시 바둑 변방이었던 한국의 조훈현과 대륙의 영웅 녜웨이핑의 맞대결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건이었다. 치열한 풀세트 접전 끝에 조훈현 9단이 3 대 2로 역전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바둑의 황금기가 열렸고, 녜웨이핑은 또 한번의 신화창조를 눈앞에 두고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영화 ‘승부’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해당 대국이다. 이후에도 녜웨이핑은 후지쓰배와 동양증권배 등에서 결승에 올랐으나 번번이 준우승에 머물며 세계대회 우승과는 끝내 인연을 맺지 못했다.
특히 응씨배 결승에서 만난 조훈현 9단과는 승부를 넘어선 50년 지기 우정을 쌓아왔다. 눈보라 속에서 치러진 이번 영결식에 한국 조문단으로 참석한 조훈현 9단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지난해 3월 만났을 때만 해도 건강해 보였는데, 갑작스러운 비보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는 “40~50년을 함께한 친구를 잃어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편안하게 쉬길 바란다”며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 바둑 한 판 두고 싶다”며 애틋한 작별 인사를 남겼다.
녜웨이핑 9단은 현역 은퇴 후에도 후학 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1999년 베이징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바둑도장을 설립해 유소년 기사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이는 당시 한국과 일본에 비해 열악했던 중국의 훈련 환경을 개선하기 위함이었고 그 결과 창하오, 구리, 커제 등 중국 바둑의 일인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커제 9단은 “지금도 택시기사들이 나에게 녜웨이핑 국수보다 세냐고 묻곤 한다. 수십 년이 지나도 중국 사람들에게 바둑은 곧 녜웨이핑이다”라며 고인의 영향력을 기렸다.
유경춘 객원기자 master@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