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왕실은 부계 혈통의 남성만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한다. 바꿔 말하면, 아이코 공주는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임에도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 더욱이 일반 남성과 결혼하면 왕실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다. 현재 왕위 계승 1순위는 일왕의 동생인 후미히토 왕세제(60)이고, 2순위는 후미히토의 외아들인 히사히토 왕자(19)다. 사실상 히사히토 왕자가 유일한 계승자라 “자칫 왕실의 대가 끊길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일본 정치권은 여야 협의를 통해 왕실 구성원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다. 쟁점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여성 왕족이 결혼 후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하도록 하는 방안이며, 다른 하나는 구 왕족 출신 남성을 왕실로 복귀시키는 방안이다. 다만 정치권의 입장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관련 협의는 2025년 봄 이후 사실상 중단 상태에 들어갔고, 장기간 표류했다.
분위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올해 4월부터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이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규정하면서 여야 협의가 재개됐다. 자민당 내 강경파가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이른바 ‘구 왕족 복귀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혁 과정에서 왕족 지위를 잃고 일반인이 된 방계 왕족 가문의 남성들을 왕실로 불러들이자”는 구상이다. 이들 가문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무로마치 시대 왕가와 연결되는 남계 혈통이기 때문에 지금도 보수층에서는 “전통 왕통을 유지할 수 있는 적통”으로 여겨진다.
과거 11개였던 구 왕족 가문 가운데 현재 남계 남성이 남아 있는 가문은 가야노미야, 구니노미야, 히가시쿠니노미야, 다케다노미야 등 네 가문 정도다. 자민당은 이들 가운데 일부를 현 왕족의 양자로 편입시키는 방식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왕실 인물로는 아이코 공주가 꼽힌다. 실제로 “여성 일왕을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은 꾸준히 70~90%대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자민당 내에서도 “여성 일왕을 제한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강경보수파는 여계 일왕에는 선을 긋는 분위기가 강하다.
한 자민당 의원은 “아이코 공주가 일왕이 되면, 장래에 태어날 자녀는 여계가 된다”며 “만약 아들이 태어난다면 국민적 인기가 높을 것이고, 결국 여계 남성 일왕을 인정하자는 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어 “아이코 공주 한 대에서 끝난다는 보장이 없다면 여성 일왕에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다카이치 총리 역시 과거 “여성 일왕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여계 일왕에는 반대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주간지를 중심으로 아이코 공주의 ‘결혼 상대 후보’를 둘러싼 보도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주간겐다이’는 최근 “국민 다수가 바라는 ‘아이코 일왕’을 실현할 열쇠는 결혼 상대가 쥐고 있다”며 구 왕족 가문 출신 남성과 아이코 공주가 결혼하는 시나리오를 이른바 ‘비장의 카드’로 소개했다. “남계 혈통을 유지하면서도 아이코 공주의 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절충안”이라는 주장이다.
주간겐다이는 “배우자가 남계 혈통의 구 왕족이라면, 그 자녀는 모계이면서 동시에 남계 혈통이기도 하다”며 “남계 계승 원칙을 중시하는 보수파도 수용 가능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심지어 “고 아베 신조 전 총리 역시 비슷한 구상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도 등장했다. 생전 아베 총리가 측근인 스기타 가즈히로 당시 관방부 장관에게 적절한 인물을 물색하도록 했고, 그 과정에서 가야노미야 가문 출신 남성들이 거론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간지 ‘여성세븐’은 한발 더 나아가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 출신의 20대 남성 A 씨를 ‘유력 후보’로 지목하기도 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은 구 왕족 가운데서도 상징성이 큰 가문으로 꼽힌다. 일부 주간지는 “미치코 상왕후가 과거 주변에 ‘A 씨가 아이코 공주의 배우자로 적합하다’는 언급을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왕실 측이 이를 공식 확인한 적은 없다.
다만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장벽이 적지 않다. 현행 왕실전범은 남계 남성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왕족의 양자 입적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아이코 공주의 즉위를 현실화하려면 여성의 왕위 계승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꾸는 동시에, 구 왕족 남성을 다시 왕실 구성원으로 편입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 역시 손질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구 왕족 남계 남성을 왕족으로 인정하고 왕실전범 제1조만 개정하면, 아이코 공주의 즉위와 남계 계승 원칙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하지만 이런 논의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아이코 공주의 의사가 빠져 있다”는 비판이 많다. 왕위 계승 문제를 이유로 특정 남성과의 결혼 가능성까지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상황 자체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도 “공주의 결혼을 정치적 도구처럼 소비하고 있다” “정작 당사자의 의사는 어디에 있느냐”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왕실 연구자인 다카모리 아키노리는 “아이코 공주의 의사를 배제한 채 남계 유지를 위해 특정 상대와의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나루히토 일왕 부부처럼 평생 함께할 상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아이코 공주도 지난해 기자단 질문에서 자신의 결혼관을 직접 언급한 바 있다.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그는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부모님처럼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관계가 멋지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해외에서는 “일본의 왕실 제도가 시대 변화와 괴리돼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여성 총리까지 배출한 일본이 여전히 여성의 왕위 계승은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코 공주의 결혼을 둘러싼 논란은 이러한 일본 왕실의 낡은 딜레마를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