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28일 노무현 대통령(맨 오른쪽)이 청와대에서 수 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문재인 민정수 석, 유인태 정무수석,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 문희상 비 서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
‘오너’인 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한 ‘입주자’들은 입을 닫고 있다. 노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고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전달해야 할 참모들 상당수가 말하기를 멈춘 것이다.
최근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오랜기간 정치적 인연을 맺어온 인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노 대통령에게 청와대 386을 견제하라는 조언을 왜 하지 않느냐”는 항의 섞인 건의를 받자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에 따르면 이 고위관계자는 그간 수차례 노 대통령에게 386 견제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굿모닝 게이트’ 이후 이 관계자가 다시 ‘386 견제론’을 끄집어 내자 노 대통령은 “이제 그만 좀 하십시오”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고위관계자는 이날 이후 노 대통령에게 386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은 물론 다른 조언도 조심스러워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고위관계자는 노 대통령 주변에 있는 인사들 중 이런저런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대표적 인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인사가 최근 ‘입 떼기’를 어려워 한다면 청와대의 분위기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민주당의 K의원은 “노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 주저없이 비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문희상 비서실장의 경우 이미 한 달 전부터 “엎드려 있다”는 말이 청와대 주변에서 돌기 시작했다. 문 실장 역시 과거 김대중 총재 시절에 DJ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울 정도로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 정권 출범 초 ‘여포의 외모에 제갈공명의 지략’을 가진 인사로 평가받았고 노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지난 3월 중순 노 대통령은 각종 인사회의를 문 실장이 주재토록 했고 모든 보고서를 문 실장을 거치도록 지시했을 정도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은 문 실장의 관저에서 몇 차례 단독 조찬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문 실장은 최근 자신의 조언이 노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찬용 인사보좌관 역시 현 정부 초기 대통령이 임명권을 갖고 있는 정부내 각종 인사의 추천권을 틀어지고 있어 ‘저승사자’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노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 노 대통령은 정 보좌관의 인사문제 처리와 관련, “정 보좌관이 참 예쁘죠”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호남소외론’ 등으로 곤욕을 치른 이후 정 보좌관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다.
노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참모로 꼽혀온 문재인 민정수석은 최근 ‘양길승 전 부속실장 접대 축소 의혹’으로 ‘내 코가 석 자’인 상태다. 문 수석은 노무현 초대 내각 장관 인선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물론 검찰 수뇌부 교체도 사실상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철도파업, 조흥은행 사태 등 주요 정국현안이 터질 때마다 문 수석은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민주당 정대철 대표에 대해 검찰이 영장을 청구하는 과정에서 민정수석인 문 수석이 개입은커녕 수사내용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에 대해서는 정 대표가 최근 “유인태 정무수석이나 문재인 민정수석도 수사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더 모르고 있더라”고 확인한 바 있다. 특히 문 수석은 양길승 전 부속실장 사건으로 정치적 입지가 더욱 축소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중진급 참모들이 위축됐다고 386 세대들이 모두 득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서갑원 의전비서관, 윤태영 대변인, 김만수 보도지원 비서관, 천호선 참여기획 비서관 등 노 대통령과 5년 이상 호흡을 맞춰온 ‘젊은’ 인사들은 자신의 기본 업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데다 과거와 달리 노 대통령과 독대해 정치적 조언을 하기 어려운 상태다. 더구나 이들의 경우 현재 노 대통령에 대해 제기되는 각종 비판에 대해 노 대통령과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와대 내에서 노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광재 국정상황실장도 극도의 조심스런 행보를 보이기는 마찬가지. 이 실장은 연세대(83학번)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87년 부산에서 위장취업을 해 구속됐다가 변호에 나선 노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 실장은 88년 13대 총선에서 노 대통령이 당선되자 보좌관을 맡은 이후 15년간 14대 총선, 95년 부산시장 선거, 98년 15대 서울 종로 보궐선거 등 각종 선거 때마다 대학교수 등 외부그룹과 함께 정책개발과 선거기획을 맡는 등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다.
노 대통령은 이 실장에 대해 “이 실장은 노무현 개인에 대한 존경심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 실장은 직책상 청와대 내의 각종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노 대통령에게 일부 국정과 관련한 건의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실장도, 노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각종 정보의 취합 정리는 물론 비공식적인 인사 추천, 각종 비공식적 기획까지 맡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면서 여러 곳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실장 본인도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고, 몸을 낮추어 극도의 조심스런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
이 때문인지 이 실장은 ‘386 음모론’이 거세게 청와대를 강타했음에도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이처럼 청와대의 침묵이 깊어질수록 노 대통령 지지그룹 내에서의 이반도 가속화되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도 하락하고 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대선 당선에 기여했던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 하면 부끄럽다는 말까지 듣는다”고 한탄했다.
민주당의 또다른 핵심인사는 “노무현 정부가 벌써 인물난을 겪고 있다. 내심 사람을 쓰고 싶어도 자신의 코드에 맞으면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다. 너무 코드를 강조해 동질성을 높이다 보니 능력이 있지만 이질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갖게 마련이다”고 우려했다.
위기가 깊어지고 있지만 노 대통령과 핵심측근들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국정을 잘 운영하고 있지만 반 개혁, 보수 수구세력의 조직적 저항이나 언론의 왜곡 보도 때문에 문제해결이 안되고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처럼 충분히 돌파 가능한 위기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내부에서 찾아오게 마련이다. 외부의 위기는 쉽게 인식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내부의 위기는 한순간에 붕괴를 가져온다. 노 대통령 주변에서 기성 정치인들과 다른 인사들조차 입을 닫기 시작했다는 것은 내부 위기의 깊이를 말해준다.
한나라당의 박종웅 의원은 “막상 YS가 대통령이 돼 청와대 집무실에 앉아 있으니까 그 전과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됐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신분 변화를 의미한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은 자신이 과거 대통령과 다른 행태를 보이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대통령이고, 대통령을 대하는 측근들은 과거와 다른 무게로 노 대통령을 대하게 된다”며 “그래서 자신에 대한 비판은 일부러 찾아가며 들어야 겨우 들린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