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장면. 예순 둘 이른 나이에 자살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대한민국 대통령의 퇴임 이후 잔혹사는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시작된다. 1960년 4·19혁명에 의해 물러난 이승만 전 대통령은 그해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다. 본래 이 전 대통령은 사저인 이화장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여론에 부담을 느낀 정부는 그를 거의 떠밀다시피 미국으로 쫓아냈다.
2~3주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머물 집조차 구하지 못했다. 그의 여생은 미국 유학시절 지인인 월버트 최 씨의 집에서 얹혀사는 신세였다. 전직 대통령의 연금법이 없었던 당시, 그의 생활비는 현지 교민들의 주머니에 의지했다. 당장 먹을 식료품값도 부족했다.
이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장을 보러 갈 때면 “마미(프란체스카 여사의 애칭), 한국 돌아갈 차비가 있어야 하니까 장 보는 거는 다음 주로 미루자”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망명 생활 내내 돈을 아끼기 위해 그의 양말은 언제나 누더기였다. 이발은 언제나 부인의 손을 빌렸다. 그의 삶이 오죽 처량했으면, 당시 현지 교민들은 그가 얹혀사는 방에 침대와 식탁 등 가구는 물론 숟가락과 밥그릇 등 가재도구를 모아 넣어줬다고까지 한다.
이 전 대통령은 마지막 2년을 하와이 마우나라니 노인병원에서 보냈다. 죽기 전까지 그의 치료비와 입원비도 결국 교민들의 모금으로 납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병상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는 있어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결국 그는 1965년 7월 19일, 죽고 나서야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때 건국의 아버지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그의 퇴임 이후 말년 생활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왼쪽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박 대통령에 대한 앙심은 대단했다. 두 차례에 걸친 대선(1963년, 1967년)에 나서 박 대통령과 맞선 그는 특히 한일협정을 두고 ‘굴욕협정’으로 몰아붙여 집요하게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투쟁 강도가 너무 심했을까. 1975년 그는 법원으로부터 ‘3·1 구국선언’에 참석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당대 서슬 푸른 권력에 대항하다 카운터펀치를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된 투쟁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피살 이후 신군부가 배려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모든 예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기보다는 퇴임 이후 자신의 고된 삶에 대해 본인 스스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10·26사태 이후 쫓겨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신군부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했다.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은 1980년 12월 18일 형식상 원로 기구인 ‘국정자문회의’를 발족해 의장 자리에 그를 억지로 앉혔다. 최 전 대통령은 1988년까지 의장직을 유지하며 아홉 차례의 자문회의에 개근 참석했다. 그가 한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쿠데타 직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한 것은 최규하 본인이었다. ‘전두환이 권력자로 부상할 것’이라는 외신의 보도를 무시한 채,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퇴임 이후 그의 행보는 결국 본인이 날개를 달아준 호랑이에 쫓겨나 8년간 그 호랑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굴욕의 역사였다. 이후 그는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 초라히 여생을 마감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 당시 한자리에 모인 전직 대통령들. 왼쪽부터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대선 국면과 같은 중요한 시기, 정치적 발언을 통해 ‘훈수 정치’를 이어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권력에 대한 그의 욕심은 대단해 보인다. 대통령 퇴임 직후 그는 비서진들로부터 공식적인 ‘정계 은퇴선언’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그는 “니 사꾸라(‘사기꾼’의 속어) 아이가. 내가 누구(김대중 대통령을 염두에 둔 말) 닮았나. 언제는 은퇴한다고 했다가 정계에 복귀하고 그러게”라고 단박에 거절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직후 측근들로부터 창당을 제의받기도 했다. 그는 1999년 한 인터뷰에서 “나한테 당 만들자고 하는 사람 많다. 영남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상도동으로 온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죽으면 말 못하지만 그전에는 계속할 거다. 참모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나는 ‘내가 할 말은 한다’는 생각이 있다”며 정치 개입에 대한 의욕을 숨기지 않았다. 이는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은 퇴임 전 알선수재 및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된 차남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었다. 퇴임 후에도 그는 1년 넘게 이 문제의 여파로 시름에 빠졌다고 한다. 퇴임 직후 그와 만난 한 원로 언론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오명이라 할 수 있는 IMF를 얘기해도 당당했다. 하지만 김현철 얘기만 나오면 그 당당함은 사라지고 침울한 표정을 짓곤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정치인에게도 안타까운 ‘부정’은 감출 수 없었던 셈이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하지만 퇴임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투병’의 연속이었다. 훗날에서야 밝힌 대목이지만 그는 이미 재임 중이던 지난 2000년, 주치의로부터 신장 투석을 권유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투석을 할 수 없었다. 투석을 하게 되면 업무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대통령직을 내놔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당시 내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면서 “집을 나서는 데 힘이 없었다. 겨우 정신을 집중하며 나 자신을 지탱했다. 모든 시선이 신임 대통령에게 쏠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겉으로 보인 활발한 대외활동 뒤에는 병마와의 싸움을 힘겹게 했던 것이다. 2003년 5월 심혈관 확장 수술과 함께 신장 투석을 시작한 그는 2005년 폐렴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2009년 8월 서거 직전까지 그는 거동 자체가 불편해 결국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퇴임 이후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에 그의 몸은 너무 늙고 병들어 있었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은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잔혹사의 ‘결정판’이었다. 퇴임 당시 그의 나이는 환갑을 갓 넘긴 예순둘에 불과했다. 젊었기에 분명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재임 기간 ‘좌우 분열’과 ‘경제 파탄’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퇴임 직후 그는 국민에게 많은 기대를 받았다. 실제 퇴임 직후 그의 지지율은 급상승했다.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애초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농촌복원운동을 추구하고 오랫동안 준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국내외 전직 대통령들의 다양한 ‘사회 활동 모델’을 연구하며 많은 준비를 했다. 그렇게 탄생한 봉화마을 프로젝트는 한때 전임 대통령이 직접 운영하는 ‘생태농업 공동체’로서 가능성을 엿보였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09년 5월 23일,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MB 퇴임 후 행보 관심 “뒤에서 훈수만 두진 않을 것”
이 전 대통령은 퇴임 전부터 오랫동안 퇴임 이후 활동에 대해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은 아직 젊다. 뒤에서 훈수만 두지는 않을 거다”라며 “만약 특정 활동을 시작한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기념도서관을 집무실로 이용했던 것처럼,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현재 논현동 사저는 협소한 주택밀집 지역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이미 자택 근처 삼성동 몇몇 사무실이 점쳐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임 중이던 지난 2009년 개인 재산을 털어 설립한 ‘청계재단’에 이 전 대통령이 직접 개입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이미 재단 설립 당시부터 ‘개인 재산을 특정 기관에 기부하지 않고 스스로 재단을 설립한 것은 퇴임 후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청계재단’에 이 전 대통령이 공식 개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최근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은 연말이나 내년쯤 청계재단과는 별도의 재단을 발족할 것이다”며 “본인이 펀드를 모집하고 일부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부는 요청이 있으면 전직 대통령을 위한 민간단체의 기념사업을 지원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이 전 대통령의 구체적인 구상과 사업과 관련해서는 언급된 바 없다.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본인의 치적으로 믿는 ‘통일문제’에 힘썼던 것처럼, 이 전 대통령 역시 본인의 치적과 관련한 △4대강 사업 △기후 및 환경 캠페인 등 활동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