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매왕’ 타이틀을 거머쥔 보험설계사 A씨가 근무한 미래에셋 전경.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생명보험회사에는 ‘선지급 제도’라는 것이 있다. 보험설계사가 보험계약에 성공하면 그 계약 액수의 일정 비율만큼을 미리 수당으로 지급해주는 제도다. 이때 비율은 각 보험사마다, 상품마다 다른데 보통 계약액의 30% 내외라고 한다.
A 씨는 이러한 선지급 제도를 악용했던 듯하다. 자신과 가까운 친구나 친인척 등의 명의만 빌려 보험계약을 한 후 매달 보험료를 자신이 미리 받은 선지급 수당으로 납부한 것. ‘돌려막기’를 한 셈이다. 미래에셋생명에 따르면 A 씨가 이렇게 해서 계약한 보험은 220여 건에 이른다. 액수로만 따지면 35억 원가량. 금액이 이렇게 큰 것은 A 씨가 계약한 보험의 상당수가 종신보험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보험설계사들은 잘해야 한 달에 서너 건 정도의 보험을 계약한다고 한다. 특히 종신보험은 액수가 크기 때문에 “일 년 내내 한 건도 못할 수 있다”는 게 보험설계사들의 말이다. 하지만 A 씨는 한 달에 열 건이 넘는 보험을 계약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종신보험이었다고 한다. 한 보험설계사는 “업계에서 당시 A 씨 얘기가 자주 오르내렸다”며 “부럽긴 했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A 씨는 계약건수가 늘어나자 보험료를 체납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다 챙기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금액이 워낙 불어난 탓이다. 그러자 미래에셋생명에서 A 씨에 대한 내부 감사에 나섰다. 당시 일부 보험설계사들로부터 “A 씨가 고객들의 보험료를 내주고 있다”라는 제보도 있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A 씨가 관리하고 있는 보험계약자 대부분이 A 씨에게 이름만 빌려줬을 뿐 보험료를 낸 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래에셋생명은 즉시 A 씨가 맺은 계약을 해지하고 지급했던 수당을 거의 다 회수했다. 그리고 A 씨를 퇴사시켰다.
회사 측은 “우리도 피해자”라며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A 씨에게 속은 것이란 얘기다. 미래에셋생명 관계자는 “보험계약자가 신체검사까지 받으러 와 이름만 빌려준 가짜라고 의심하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서도 이번 사건을 미래에셋생명으로부터 보고받은 후 자체적으로 조사했지만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한다. 피해를 본 소비자가 없었고 딱히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한 관계자는 “A 씨가 부당한 계약을 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라고 밝혔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이처럼 선지급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한다. 다만 A 씨의 경우엔 금액이 막대하고 또 ‘판매왕’에 올랐던 인물이기에 불거졌을 뿐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선지급 수당을 무조건 없앨 수는 없다는 게 업계 인사들의 공통적인 말이다.
원래 국내 보험사들은 선지급 수당을 12개월에 나눠서 보험설계사에게 지급해왔다. 하지만 IMF 이후에 들어온 외국계 보험사들이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꺼번에 선지급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우수한 인력이 외국보험사로 쏠리는 것은 자명한 일. 이 때문에 국내 보험사는 “마지못해 선지급 수당을 일시불로 지급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점 때문에 금융감독원에서도 선지급 제도가 일부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제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미래에셋생명이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보험설계사에 대한 관리책임은 보험회사에 있기 때문. 이 점은 미래에셋생명에서도 인정하고 계약 검증절차를 더 강화했다.
보험소비자연맹 조연행 사무국장은 “미래에셋생명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소비자들도 피해를 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기자는 A 씨의 해명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어렵게 연결된 통화에서 그는 “이제 그쪽(보험업) 일을 하지 않고 있어 해줄 말이 없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