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1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선자금 논란과 관 련, 특별 기자회견을 갖는 노무현 대통령. 노 대통령은 후 보 시절부터 여러 차례 메이저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를 토 로했다. 임준선 기자 | ||
2002년 8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핵심측근들에게 단호하게 밝혔다. 3, 4월 두 달에 걸친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거세게 불었던 ‘노풍’이 완전히 스러져 패색이 완연했던 시기였다. 노 후보는 또 당내 후보사퇴 요구에 맞서 재·보궐선거에서 지면 책임지겠다고 정면 돌파카드를 던져놓은 상태였다.
측근들은 난국 돌파를 위해 노 후보에게 다양한 주문을 했다. 경선에서 패배한 뒤 적대관계로 굳어진 이인제 의원과의 대화해, 노 후보를 줄기차게 흔들어대는 당내 반노파 의원들 끌어안기, 그리고 <조선>을 중심으로 한 세칭 메이저 언론과의 관계개선 등이 그 골자였다.
노 후보가 자신을 “폐차 일보직전”이라고 빗댈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라 대부분 건의는 수용됐다. 유독 그 중에서 <조선일보>와의 화해만큼은 수용할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다. 그만큼 메이저 언론에 대한 노 후보의 적대감은 변할 수 없는 절대명제에 가까웠다.
대선에서 승리해 인수위를 출범시킨 노 당선자가 맨 처음 내린 언론관계 지시도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지말고 술자리를 갖지 말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설령 술을 먹더라도 ‘오십세주’(소주와 백세주를 섞은 술) 정도만 마시라는 지시를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일선 기자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수치감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조선> <중앙> <동아> 등 노 당선자에 대해 비판적인 신문사는 물론 우호적 언론 종사자들도 상당수 혀를 찼다. 그의 지론인 언론개혁과는 별개로 ‘기자들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강한 불신감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관적’ 인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선기간 중 튀어나온 자신의 ‘메이저 신문 국유화 발언’파문이 결정적 계기가 됐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분석이다.
노 후보가 경선에서 기세를 올리던 2002년 4월4일 이인제 후보측 김윤수 공보특보는 “노 후보가 지난해 일부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내가 집권하면 메이저 신문들을 국유화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김 특보는 또 “노 후보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김병관 명예회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동아일보>를 폐간시키겠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고 폭로했다. 노 후보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악재가 터져나왔던 셈이다.
노 후보측은 즉각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작극”이라고 부인했다. 노 후보도 4월5일 TV토론회에서 “<동아일보> 폐간 얘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 문제가 아니다. <동아일보>가 문을 닫는다면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고 말한 것 같다”며 “국유화나 권력으로 폐간하려 했다든지 하는 말은 와전된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그 진상은 복잡미묘하다. 2001년 8월1일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민주당 상임고문을 지내던 노 후보는 5명의 당 출입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이들 기자들은 서울대 사학계열 84학번 출신들. 유망한 정치인 등을 골라 사적인 모임을 갖고 대화를 나눠왔다. 이들은 그 모임에 노 고문을 초대해 정국 현안에 대해 허물없는 얘기를 나눴다.
관행대로 폭탄주도 몇 순배 돌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술기운에 참석자들은 자유롭게 대화했다. 노 후보가 부담 없이 속내도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물론 그 자리에서 오간 대화내용은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 약속은 잘 지켜졌다. 그런데 경선이 치열해 지는 시점에 이인제 후보측이 일년 이상 지난 발언 내용을 입수해 폭로해버린 것이다.
노 후보측은 “5명의 기자 중 한 명이 대화록을 문건으로 만들어 이 후보측에 전달한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 노 후보의 해명이 진실이라면 상당부분은 악의적으로 왜곡돼서 이 후보측에 전달된 셈이다.
더욱이 이 후보측의 폭로 이후 5명의 참석기자들은 해당 매체에 당시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노 후보와의 ‘비보도’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후보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참석기자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또는 “그런 말이 오간 것 같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노 후보는 분노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장관직도 그만두고 무명의 정치인이었던 상태에서 했던 발언들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이인제 후보측에게 흘렸다고 본 것이다. “기자들과 밥 먹고 술 먹어 봐야 득 될 게 없다”는 인식은 그때 결정적으로 굳어졌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노 후보가 지난 대선과정에서 언론의 ‘피해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수혜자’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 ‘노풍’의 점화만 해도 그렇다. 지난해 3월13일 나온 모 중앙일간지와 방송사의 합동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는 처음으로 1%포인트의 격차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눌렀다. 그전까지 16대 대선은 ‘이회창 대 이인제’간의 게임이었다. 노 후보는 마이너 주자였을 뿐이었다.
▲ 노무현 후보의 ‘동아일보 폐간’ 발언에 대해 보도한 지난해 4월8일자 <조선 일보>. 바로 아래에는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1위를 달리고 있다는 ‘노무현 종합선두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노 후보를 울리고 웃기던 당시 언론의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 ||
이 시기를 전후로 쏟아져나온 십수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 일제히 노 후보가 급부상, 이인제 후보는 물론 이회창 후보도 꺾는 결과가 나왔다. 노 후보는 파죽지세로 각 지역 경선에서 선두를 달렸고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이었던 이인제 후보는 맥없이 무너졌다.
밑바닥에 숨어 있던 노 후보의 지지기반이 이 시기부터 표출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광기처럼 쏟아진 노풍 여론조사들이 노 후보라는 스타를 탄생시킨 핵심 변수 중 하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인제 후보측이 3월13일자 문제의 여론조사를 ‘음모론’의 물증으로 주장할 정도였다.
이인제 후보가 “박지원 청와대 정책특보, 임동원 국정원장, 김한길 전 의원 등이 노무현을 후보로 만들기 위해서 언론사 여론조사를 조작했다”고 말한 것으로 모 신문은 보도했다. 이 후보는 나중에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했다.
그러나 이 후보측의 선거관계자는 “여론조사가 경선을 변질시키고 있다. 광주지역 경선도 언론사 여론조사로 뒤집혔고 강원지역 경선도 방송사 여론조사 결과가 흘러나오면서 어처구니없이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도하 언론들의 ‘노풍 몰이’는 공무원 조직에도 일대 충격을 줬다. 차기 정권은 이회창 후보가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 일거에 반전되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해 4월 중순경 A장관은 사석에서 이렇게 전했다. “그간 복지부동하던 공무원들이 노풍 바람이 불자 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대구·경북(TK)쪽 사람들은 업무에 비협조적이고 시간 가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였었다. 그러나 노풍이 불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김대중 정부가 끝나도 자기들 시대가 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듯싶다.”
선거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공무원 사회의 변화까지 이끌어낸 언론보도들은 노 후보의 지원군이었던 셈이다. 노 후보도 이 점을 인식했던 것 같다.
그 해 4월 중순 민주당 서울지역 지구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노 후보는 “언론과의 관계를 보니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97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죽어라하고 미워하는 언론이 많았다. 도와주는 언론은 <한겨레>뿐이었다. 그것을 뚫고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이제 훼방을 놓는 신문의 힘이 그때보다 반의 반도 안된다. 파워가 김 대통령의 절반만 되도 (내가) 대통령이 되는 데 지장이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대선기간중 노 후보는 이회창 후보에 비해 언론관계에 훨씬 적극적이었던 측면이 적지 않다. 그 해 2월 모 중앙언론사가 주최한 여야 대선후보 초청 네티즌 토론회만 해도 그랬다. 이회창 후보는 아예 토론회에 불참했다. “아직은 언론과 공식적인 인터뷰나 토론회를 하지 않겠다”는 게 이회창 후보측의 입장이었다.
반면 노 후보는 주최 언론사의 형편에 따라 토론회 참석 일정을 조정해주었다. 그 해 하순경에 열린 모 언론사 주최 행사 참석건도 그랬다. 당초 그 신문사는 노무현 이회창 정몽준 후보를 초청할 예정이었다. 노, 정 후보측은 참석방침을 통보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후보가 ‘참석불가’ 입장을 알려왔다. 대신에 부인인 한인옥 여사가 참석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최측은 고민 끝에 초청 대상을 ‘3후보 부인’으로 바꿔서 세 후보측에 알렸다. 행사 당일 노 후보는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참석했다. 노 후보는 대선기간중 이처럼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 개혁적이고 젊다는 자신의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알렸다. 한국언론의 문제점을 절감하면서도 그 위력과 강점을 잘 파악해서 도약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회창 후보는 언론매체의 정치적 활용도 면에서 노 후보에게 한참 밀렸다. 이 후보 측근들이 항상 안타까워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충고’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회창 후보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신년 인사차 전 전 대통령을 찾았다. 거기서 전 전 대통령은 이 후보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고 싶으냐. 그러면 내가 말하는 걸 한 번 해보라. 부인께서 고향이 경남 산청이라고 들었다. 허나 (그 사실을) 영남지역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번 설에 부인 고향에 내려가면 동네 주민들에게 ‘이 서방이 왔다’고 하면서 막걸리라도 함께해라. 그 장면이 언론에 나면 득표에 상당한 보탬이 될 거다.”
정치와 언론의 상승관계를 활용하지 못하는 이 후보에게 ‘비법’을 전수한 셈이다. 실제로 이 후보는 이후 경남지역을 방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가 다른 한편으로는 부단히 언론과의 전선을 강화하게 된 데는 ‘말투’가 중요한 단초가 됐다. 특유의 직설법을 즐기는 스타일 때문에 ‘거친 표현’이 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론매체들, 특히 메이저 신문들은 노 후보의 거친 표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대통령 자질문제’로 연결시켰다. 노풍 초기에 이회창 후보와 20%포인트까지 격차를 벌렸던 노 후보의 지지율이 ‘급전직하’하는 데 노 후보의 ‘설화 파문’보도들이 주요하게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노 후보가 5월28일 인천 유세에서 남북문제를 언급하면서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다 깽판 쳐도 괜찮다”고 언급한 것은 대표적 사례다. 메이저 신문들이 중심이 돼서 노 후보의 ‘대통령 자질’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노 후보는 궁지에 몰렸고 가뜩이나 빠지던 지지율이 하락세를 탔다.
노 후보는 그러나 5월30일 부산에 내려가 “깽판이라는 말을 써 혼이 났고 속이 쓰리지만 한 번 더 하겠다”며 “이회창 후보는 남북 대화를 깽판 놓으려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노 후보는 자신의 어법에 대한 안팎의 비판이 거세지자 말조심을 했다. 그 와중에서 ‘쪽팔려’라는 표현도 썼다. 어떤 표현을 쓰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문맥에서 나왔다. 이 역시 언론의 성토대상이 됐다.
노 후보측 관계자는 당시 “노 후보는 언론의 문제 제기가 부당하다고 본다. 말꼬리를 잡아서 자질문제로 연결시키는 것은 언론의 이회창 후보 지원사격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푸념하기도 했다.
반면 언론이 노 후보의 화법만 문제삼았다고 볼 수 없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회창 후보의 화법이 상대적으로 언론 보도의 타깃이 덜 됐던 것은 이 후보가 ‘건조한 어법’을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후보의 경우 공식석상에서는 대법관 출신답게 의례적 표현을 즐겼다. 연설문도 보좌진들이 ‘강약’을 적당히 섞어서 작성하면 다소라도 튀는 듯한 표현은 모두 삭제하고 ‘평평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이 후보 진영에서는 “이 후보의 신중한 성격으로 인해 젊은 층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표현을 못쓴다”는 불평이 적지 않았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