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에 치러진 4·13총선 직후 총선시민연대 대표 단이 최종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 들이 다시 뭉쳐 신당을 띄울 전망이다. 이들 뒤에 있는 낙 선 상황판은 과연 당선 상황판으로 ‘화려한 변신’을 할 수 있을까. 사진 맨 왼쪽이 박원순 | ||
사실 87년 시민항쟁 이후 시민사회의 정치참여 논의는 계속돼 왔다. 이런 과정에서 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총선연대가 낙선운동 등을 활발히 펼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시정추’는 시민정당 창당을 최종목표로 두고 기존 정치권의 물갈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적극적인 정치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 시민운동 진영의 정치세력 결성은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잉태된 당연한 결과다. ‘시정추’는 민주당 개혁신당 창당이 지지부진하면서 국민들의 외면을 받는 등 더 이상 정치권 스스로 변화와 개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상황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까지 기존 정치권에 인재를 수혈하는 수준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시민정당을 창당해 기존 정치인을 선별 영입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과연 시민운동세력의 또 다른 정치실험은 성공할 것인가.
내년 17대 총선에서 폭풍의 핵으로 떠오를 것으로 보이는 ‘시정추’에는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최열 환경연합 대표, 이오경숙 여성연합 상임대표, 김상희 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정대화 상지대 교수, 오충일 목사, 박원순 변호사 등이 핵심 멤버.
사실 이들을 포함한 많은 시민단체 운동가들이 올해 초부터 시민운동세력의 정치세력화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벌여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결성된 시정추는 지금까지 4~5차례 공식 모임을 가지고 향후 활동을 논의해오고 있다.
시정추의 구체적 논의 결과는 오는 9월8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1천인 선언식’을 통해 드러날 전망이다. 이 선언의 정식 명칭은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주체 형성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천인 선언’. 시정추는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뒤 지난 8월25일부터 각계 유명인사 1천 명을 대상으로 서명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정치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인사들이나 후보로 뛰지는 않지만 당원이나 발기인으로 정치활동을 할 인사, 그리고 시민 정당이 필요하다고 동의하는 인사들까지 포함해 1천 명을 모을 예정이다.
시정추 멤버 중 한 명인 최열 환경연합 대표는 이에 대해 “앞으로 이들 1천명이 시민정당의 인재풀이 될 수도 있다. 만약 9월8일 선언식까지 신당논의도 활발히 진행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면 총선 후보 찾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다”고 밝혔다.
또한 최 대표는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개혁인사들 중에서 총선에 꼭 나가야 할 사람들을 선별한 뒤 그 대상자가 결단을 내린다면 능히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정추가 내년 총선에 대비해 적극적인 정치세력화를 이루고 신당 창당까지 목표로 둔 것은 현실정치에 대한 절망감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다. 이들이 논의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기존 정치권의 매커니즘과 참여인사들로는 정치개혁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시정추는 낡은 정치, 부패정치, 지역 정치를 청산해야 하는 것이 국민들의 열망인데 기존 정치권으로는 신당을 만들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정추 멤버인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시민운동가들의 정치세력화는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시민운동 진영의 최대 화두는 어떻게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느냐다. 이제는 제도를 바꾸어야 될 것이 아니라 담당자(정치인)들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시민운동세력의 정치조직화는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이다. 그만큼 한국 시민운동이 성숙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정치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시민단체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시정추의 향후 역할도 주목된다. 시민운동세력은 그동안 정치권의 외곽 지원세력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정치권의 중심으로 들어가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 이부영 의원 등 한나라당 탈당파 5인방은 시정추의 정치 세력화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7월 탈당 기자회견 장면. | ||
그런데 시민정당이 창당된다면 가장 큰 문제는 자금과 조직력이다. 이에 대해 시정추 관계자들은 낙관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최열 대표는 “정치비용 자체를 혁신적으로 줄여 기존 시민사회단체가 그랬듯이 ‘저비용 고효율 정치’를 한번 보여주겠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최 대표는 또한 “창당에 필요한 자금이나 조직은 우리 시민단체가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얻은 정치 노하우가 있고 꼬마민주당 같은 정당에도 참여해본 인사들이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본다. 인력풀의 경우도 각 시민단체가 정치권 못지 않은 많은 인재와 기동력 있는 실무팀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다.
정대화 교수도 이에 대해 “자금과 조직 문제는 확실한 원칙이 있으면 (해결)된다. 사람이 좋으면 돈은 따라오게 마련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사람들이 몰리면 돈은 종속변수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정추는 기존 정치권과의 연합 논의에 대해서 일단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신들의 입지가 굳건해지고 난 뒤 ‘떳떳하게’ 그들을 선별 영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시정추는 주로 민주당 김근태 신기남 의원 등 신주류 인사들과 이부영 의원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탈당파 등을 정치권의 ‘영입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복안이 성공한다면 시민정당이 여권 개혁세력의 통합신당 창당에 주도적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 시정추는 이를 위해 정치신인 영입 등 ‘내공쌓기’에 더욱 힘을 기울일 예정이다.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은 시정추의 시민정당 창당 움직임에 대해 “현재 시민정치추진모임측과 향후 정치일정에 대해 상의하고 있는 상태다. 매우 바람직스럽고 새롭고 깨끗한 흐름을 우리 정치쪽에 접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다. 개혁신당에 관심 있는 인사들과도 이 문제에 대해 적극 논의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또한 이 의원은 “이 모임이 정치세력화한다면 탈당파 5인방들은 당연히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쪽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다(이 의원은 이 대목에서 자신들이 시민정치추진모임에 ‘간다’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주문했다)”라고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시정추가 추진하고 있는 시민정당 창당 과정에 어려움이 산적한 것도 사실이다. 먼저 시정추가 추진하고 있는 시민정당에 시민단체 조직 전체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시민단체가 정치활동을 하는 것도 어렵다.
참여연대의 한 인사는 시정추가 추진중인 시민정당에 대해 “참여연대 전체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공식 논의한 적이 없다. 우리는 먼저 정치참여보다는 제도개혁에 목표를 두고 있다. 앞으로 시민정당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지만 현재로선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도 이와 비슷한 입장이다. 민변 출신 인사들이 내년 총선에서 대거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민변의 입장은 이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민변 김진욱 사무차장은 “우리는 시민단체이기도 하지만 법률가단체여서 지난 총선에서도 정치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논의를 해봐야 할 것이다. 민변은 주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에 대해선 소극적인 편이다”고 말했다.
정치학자 손호철 교수(민교협 의장)는 시민정당 가능성에 대해 “시민단체들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봐야 알겠는데 일단은 한국사회에 정치개혁세력들의 풀이 없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본다. 그리고 기존 정치권과 역할 분담을 할 것으로 본다. 조직적 차원에서 시민단체가 정치활동이나 정당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시민운동 출신가들이 중심이 돼서 절충적인 형태로 정치에 참여할 것으로 본다. 정당을 만들더라도 시민단체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세력의 한 축으로 참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민정당의 독자 창당 가능성보다는 범개혁세력 통합신당의 한 일원으로서 시민운동가들이 많이 참여할 것으로 본다는 해석이다.
한편 시정추 멤버이기도 한 박원순 변호사는 시민정당 창당에 대해 조금 다른 견해를 보였다.
“나도 시정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그 모임이 어떤 정치적 결사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년 총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던 것뿐이다. 시민단체 연합회에서 정치단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시민운동가를 중심으로 한 개혁인사들이 참여하는 시민정당이 창당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것도 현재 한국 시민운동세력의 역량을 보면 과연 그럴 만한 정치적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현재로선 시정추가 저마다 다른 시민단체 및 회원들의 생각을 ‘통합’할 수 있는 명분과 조직력을 갖추는 것이 시민정당 창당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민정당 창당 움직임을 놓고 정치권은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신주류측은 시민정당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자신들의 신당 논의 부진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내심 불편한 기색도 비치고 있다.
민주당 신주류의 한 인사는 “시민정당 창당에 대해선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제의는 전혀 없었다. 아직 민주당 신당 창당 논의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시민정치추진모임과 책임 있는 얘기를 할 상황이 아니다”고 조심스럽게 견해를 밝혔다.
한나라당은 시민정당 창당 논의에 대해 오히려 ‘반색’하는 분위기다. 한나라당 신동철 부대변인은 “순수 시민단체와 시민단체의 탈을 쓴 ‘친노 친위대’들이 구분될 수 있다는 면에서 오히려 이 기회에 내놓고 정치활동을 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고 밝혔다.
신 부대변인은 시민정당의 창당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쪽이 추구하는 것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청와대 개혁성향 비서관, 한나라당 탈당파들, 민주당 신주류 일부와 연합해서 충분히 당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청와대의 지원도 큰 몫을 차지할 것으로 본다. 이것이 여권의 개혁신당인 셈이다”고 말했다.
지금 시민사회는 ‘정치세력화’와 ‘시민정당’이란 목표를 앞에 두고 세차게 용틀임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는 정치적 업그레이드가 피할 수 없는 추세이자 대세’임을 주장하며 출사표를 던질 태세다. 시민정당의 출현 시기와 파괴력은 이제 전적으로 ‘시민’들의 뜻에 달려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