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변호사모임, 유신·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긴급조치 위헌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에 앞서 정치권에서도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 바 있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캠프는 앞 다퉈 긴급조치 피해자 구제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현재 이 법안들은 소관 위원회조차 잡지 못한 채 묵혀 있다. 이번 위헌 판결을 이끌어 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필두로 법조계 일각에서도 소송을 준비하고 있지만 제각기 동상이몽에 빠진 모습이다.
지난 1일 민변에서는 긴급조치 피해자 구제를 위한 설명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60여 명의 긴급조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에게 박정희 정부를 향한 푸념을 늘어놓았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된 사람부터 아버지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당했다는 30대 남성까지 사연도 가지각색이었다. 과거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은 피해자는 1140명, 관련 사건은 585건에 달한다.
민변의 오지은 실무조사 간사는 “민변에서는 2007년부터 긴급조치와 관련한 위헌 판결과 피해구제를 위해 노력해 왔다”며 “이미 160여 명이 민변을 통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 상황이고 설명회 이후 꾸준히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설명회에 참석한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내가 얼마의 배상금을 받을 수 있는가’였다.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오종상 씨에게 1억 1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바 있어 많은 참석자들이 오 씨와 비슷한 배상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듯도 보였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변호사는 “오종상 씨는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이라는 무거운 형량에 고문도 당했고 이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지 못했던 점 등이 고려됐다. 오 씨와 같이 억대의 배상 판결을 받을 수 있는 피해자들은 사실 많지 않을 것”이라며 “위헌 판결 이후 몇몇 법무법인에서 소송을 지원하려고 하면서 피해자들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전했다. 이미 서울고법에는 80여 건, 서울중앙지법에는 20여 건의 긴급조치 재심사건이 계류 중이다.
변호사 출신의 한 초선 의원은 “민변에서 진행하는 소송은 엄밀한 의미에서 ‘집단소송’ 개념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집단소송이 적용되는 것은 주가조작으로 인한 금융피해나 대규모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에 해당한다”면서 “민변이 준비하는 긴급조치 소송은 개인 소송을 뭉쳐서 민변이 대리하는 형식이고 신청한 사람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피해구제는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한다”고 밝혔다.
헌재는 지난달 21일 8명 전원일치로 긴급조치 위헌 결정을 내렸다. 연합뉴스
민주통합당 역시 대선 전후로 긴급조치 관련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깜깜무소식. 그 중 전해철 의원이 대표 발의한 ‘유신헌법하 긴급조치 위반 유죄판결의 일괄무효를 위한 법률안’은 이번 위헌 판결과도 맥이 닿아 있다. 전해철 의원 측은 “이번에 위헌 결정이 나면서 기존에 여야가 발의했던 피해보상안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통해 국가배상을 받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며 “물론 정부에서는 소송을 통한 국가배상보다 보상 쪽으로 가는 것을 선호할지도 모르겠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정치권과 법조계가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어 피해자들은 더 고민스럽다. 민변 설명회에 참여했던 김 아무개 씨는 “위헌 판결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뉴스를 보고 알았지만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됐다. 민변과 같은 기관이 없다면 평생 하소연할 곳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또 다른 긴급조치 피해자인 류 아무개 씨는 “지금 정치권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 말장난일 뿐”이라며 “변호사들 역시 피해자들은 안중에 없고 자기들 돈 벌려고 도와주려는 것 아니냐”라고 의심스러워했다.
민변에서는 긴급조치 관련 소송은 재심까지는 무료 변론이지만 국가배상 청구 시 소송비용은 피해자들의 형사보상금에서 충당하고 이후 국가배상이 나온 금액의 5%를 수임료로 갖고 나머지 5%는 희망자에 한해 민변 내 공익재단에 기부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법무법인에서는 아예 모든 비용을 무료로 변론해 주겠다고 피해자와 개별 접촉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남오연 대한인권변호사협회장은 “민변에서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피해자 배상액으로 공익기금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며 “피해자 350명이 평균 2000만 원씩만 국가배상 판결을 받는다고 계산해도 그 중 10%면 7억 원을 민변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민변의 긴급조치 변호단 간사를 맡고 있는 조용선 변호사는 “일부 변호사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가 당연히 있을 수 있다”라며 “긴급조치 건은 단순한 재심 청구와 국가손해배상소송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미 오랫동안 일한 민변이 아니라 위헌 결정 이후 급하게 뛰어든 이들에게 맡겨서야 되겠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앞서의 남 회장은 “현재 국내 변호사가 1만 2000명이다. 변호사 10명 중 1명만 긴급조치 피해자 소송을 대리해도 이 정부가 말하는 국민대통합이 이뤄지는 것”이라며 “정치권이든 법조계든 특정 사안을 기득권화해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반박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