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중훈 선대회장이 기거했던 부암장 터. 창업주 기념관 건립과 관련, 형제들 간 소송에 걸려있다. | ||
갈등의 ‘모태’가 된 것은 한진가 4형제가 지분을 균등하게 공동보유해온 기내면세품 납품업체 ‘브릭트레이딩’. 이 회사는 대한항공에 수익을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그런데 지난 2003년 대한항공이 조양호 회장이 설립한 삼희무역에 기내면세품 독점납품권을 넘기면서 브릭트레이딩은 수입원을 잃게 됐다.
한진가 형제들은 브릭트레이딩으로부터 매년 배당금 2억~4억 원을 받았는데 브릭트레이딩이 납품권을 잃고 폐업 상황에 이르면서 형제들의 배당 수익도 사라지게 됐다. 조남호-정호 형제는 지난 2006년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조양호 회장이 동생들 동의 없이 면세품 납품업체를 마음대로 바꾼 만큼 30억 원을 배상하라’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에 이르렀다.
지난 2월 담당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부장판사 이내주)는 “장남 조양호 회장이 두 동생에게 6억 원씩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조정결정을 내렸지만 당사자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재판부는 지난 9월 26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조양호(한진그룹·대한항공)-조남호(한진중공업)-고 조수호(한진해운)-조정호(메리츠금융) 형제가 계열분리에 합의한 상태에서 대한항공에 그 존립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브릭트레이딩을 조양호 회장 몫으로 정리하는 것에 원고들이 묵시적으로 동의했다’는 것이 판결문 내용의 골자다.
조남호-정호 형제는 곧바로 항소 의사를 밝히며 형제들 간 법정갈등의 장기화를 예고했다. 대한항공 측은 “재판부가 조양호 회장 동생들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밝혀준 것”이라 역설하지만 조남호 회장이 이끄는 한진중공업 측은 “1심으로 재판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이 논란의 핵심은 브릭트레이딩의 설립 취지에 있다. 한진중공업 측은 “브릭트레이딩은 고 조중훈 회장이 ‘형제들이 골고루 수익을 배분해 가지라’며 설립한 회사”라고 주장한다. 한진가 4형제는 브릭트레이딩 설립 당시부터 24%씩 지분을 나눠 갖고 있었다. 대한항공 납품으로 발생하는 배당액을 형제들에게 공동으로 분배하겠다는 선친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게 조남호-정호 형제 측 주장이다.
그러나 조양호 회장 측의 설명은 다르다. 브릭트레이딩은 고 조중훈 회장이 아닌 조양호 회장이 만든 회사라는 것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지난 1990년 조양호 회장이 브릭트레이딩을 설립, 형제들이 지분 참여를 하도록 해준 것”이라 주장한다. 동생들이 수익을 얻어가도록 해준 것은 선친이 아닌 맏형 조 회장이란 뜻이다.
1990년 당시는 조중훈 선대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던 시기이며 조양호 회장은 대한항공 부사장이었다. 브릭트레이딩을 만들고 형제간 지분 배분을 주도한 것이 고 조중훈 회장이었는지 조양호 회장이었는지가 2심 법정을 달굴 쟁점이다. 1심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2심 재판부가 형제간 계열분리 합의와 브릭트레이딩의 대한항공 종속 논리를 따라 조양호 회장 손을 들어줄지 관심이 쏠린다.
브릭트레이딩 재판이 항소심 국면으로 넘어감에 따라 한진가 형제들은 두 건의 재판을 동시에 진행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지난 1월 조남호-정호 형제는 조양호 회장과 ㈜한진의 최대주주 정석기업을 상대로 ‘선친 사가인 부암장 지분을 분할하고 정신적 피해보상액 1억 원을 각각 지급하라’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부암장은 조중훈 선대 회장이 기거했던 한진가의 성지 같은 곳이다. 조남호-정호 형제는 부암장 터에 짓기로 약속된 창업주 기념관 건립이 계속 지연돼 정신적 고통이 크다며 부암장 터 지분 6.5분의 2를 돌려달라는 입장이다. 지난 2002년 선대 회장이 숨진 뒤 2003년 형제들 간 합의로 부암장을 기념관으로 만들기로 하고 부암장 지분을 모두 정석기업에 넘겼으나 조양호 회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그 땅에 독자적으로 기념관을 짓겠다는 것이다. 대한항공 측은 “기념관 건립 추진은 현재 진행 중”이라며 굳이 소송까지 갈 필요가 없는 일이란 입장이다.
한진가 형제들의 갈등 요인은 ‘선친 유지’에 대한 해석 방향에 있다. 두 건의 소송에 등장하는 손해배상 청구액 30억 원이나 1억 원이 재벌가 자제들에게 그리 큰돈도 아닌 점을 감안하면 갈등의 주된 배경을 깊이 파인 감정의 골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계열분리 과정에서 ‘알짜배기는 맏형인 조양호 회장이 다 챙겼다’고 보는 조남호-정호 형제는 조중훈 선대 회장의 유언장이 위조됐다는 의혹을 제기해왔다.
이는 지난 2005년 조남호-정호 형제가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한 ‘정석기업 차명주식 증여 소송’을 통해 법정갈등으로 비화된다. 정석기업 대주주 명부에 있는 조중훈 선대회장 동생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과 조 회장 외숙부인 김성배 한진관광 고문 명의 지분이 차명으로 관리돼 온 것이며 원래 조남호-정호 형제 몫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재판은 결국 지난 2006년 10월 법원이 조중건 전 부회장과 김성배 고문 보유 정석기업 주식 6만 9000주를 조남호-정호 형제에게 증여하는 조정을 집행하면서 마무리됐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 측은 “차명주식은 절대 아니지만 조중건 전 부회장과 김성배 고문이 집안 화목을 위해 지분을 내놓은 것”이라 밝힌 반면 한진중공업 측은 “소송 사유가 분명했으며 법원이 강제조정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석기업 지분에 형제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이 회사가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핵인 ㈜한진 지분 17.75%를 보유한 최대주주인 까닭에서다. 정석기업 관련 소송은 일단락됐지만 이 회사를 둘러싼 형제들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됐다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조남호-정호 형제가 증여받은 주식 6만 9000주는 정석기업 지분율 3.45%에 해당한다. 브릭트레이딩 소송에서 보듯 정석기업의 수익 및 지분 구조에 변화가 있을 경우 주요주주인 조남호-정호 형제가 가만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두 개의 소송을 진행 중인 한진가 형제들에게 정석기업은 당분간 뇌관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 있을 전망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