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위영 독도문제연구소 소장.
1900년 10월 25일 고종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선언하며 ‘대한민국 칙령 제41호’를 공포한다. 칙령 2조에 따르면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독도의 명칭이 공식적으로 ‘석도’가 된 셈이다.
하지만 당시 독도는 석도라는 명칭 외에도 ‘독섬’ 또는 ‘돌섬’ 등으로 자주 불리기도 했다. 돌섬은 돌로 이루어진 섬이라는 의미, 독섬의 ‘독’은 ‘돌’의 전라도식 방언이라고 전해진다. 돌섬이라는 전라도식 방언이 퍼진 이유는 1883년 울릉도 개척 사업이 추진됐을 당시 이주민의 80%가 전라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독도(獨島)’라는 명칭은 1906년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당시 울릉군수였던 심흥택은 자신의 상관인 강원도관찰사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독도(獨島)’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심흥택이 보고서를 올린 이유는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의 일본 관리들이 울릉도를 방문해 “독도가 일본영토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전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05년 일본은 이미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심흥택이 독도(獨島)라는 명칭을 갑작스레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 소장은 “이 과정에서 일본 관리들의 ‘입김’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일본 관리들이 심흥택 군수에게 “한국에는 독도를 부르는 명칭이 너무 많으니 독도(獨島)로 통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끊임없이 설득했다는 것. 일본 관리 입장에서는 향후 영유권 분쟁에 있어 한국에게 혼란을 주고 일본에게 도움이 될 것을 의식해 독도(獨島)라는 명칭을 쓰게끔 의도했다는 게 김 소장의 주장이다.
독도의용수비대장이었던 홍순칠 씨의 할아버지 홍재현 씨가 일본에서 다케시마 관리의 아들과 찍은 사진.
1977년 <월간 학부모>에 홍순칠 대장이 기고한 ‘독도에 숨은 사연들’에는 이러한 홍재현 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홍순칠 대장은 당시 기고에서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한문으로 석도로 된 섬이 돌섬이며, 또 형태도 돌섬인데 독도(獨島)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생존 시에 여러 번 원망조로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기나긴 독도 연구로 홍순칠 대장과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는 독도문제연구소 김위영 소장은 <일요신문>에 “홍순칠 대장이 죽기 전까지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 사실을 꼭 밝혀달라고 부탁했다”며 “홍 대장의 부탁대로 끊임없이 연구한 결과 1995년 일본이 독도(獨島)라는 명칭을 주장한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김 소장이 확보한 증거는 1904년 9월 25일에 작성된 일본군함 ‘신고호’의 항해 일지다. 독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당시 항해일지 내용에 따르면 ‘리앙꼬르도암, 한인은 이것을 獨島라고 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일본군함에서 처음으로 독도(獨島)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 리앙꼬르도암은 당시 독도에 대한 유럽이나 미국의 명칭이었다.
김 소장은 “일본군함의 항해 일지를 봐도 독도(獨島)라는 명칭 사용은 독도를 잘 알고 있던 일본군부가 주도가 되어 은밀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며 “이제라도 독도라는 명칭의 유래를 후대가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