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당 노무현이 노동자 잡네.”(민주노총)
노무현 대통령과 노동계의 대결이 심상치 않다. 노 대통령은 노사관계에서도 ‘힘의 균형’을 중요시하며 상대적 약자인 노동계의 의견을 존중해 그동안 지속돼온 사용자와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견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노 대통령의 잇단 노동계를 향한 강경발언만을 놓고 보면 그 기조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따른 노동계의 반응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 정권 초기만 해도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노무현 대통령과 노동계 사이가 최근 노동계의 투쟁과 대통령의 강성 발언 등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29일 청와 대 경호실 사격장에서 사격을 해보는 노 대통령. | ||
두 진영 간의 ‘말싸움’은 자칫 정면대결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8월31일 “정부 발표와 달리 추석에 임박해 심각한 물류 마비현상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최근 노사문제와 관련해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법과 원칙으로 대응해 나가겠다”면서 원칙론을 강조하고 있다.
정권 초기만 해도 ‘밀월’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 ‘노-노’ 관계가 ‘신혼’ 6개월 만에 ‘파경’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왜 이런 사태까지 일어난 것일까. 노-노 정면충돌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의 노사관계 정책운용에 대한 평가부터 살펴보자. 국민이 매긴 점수는 ‘낙제점’에 가깝다.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2백76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0% 늘었다. 분규 참가자는 무려 50% 급증한 12만4천2백5명으로 ‘파업 공화국’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이러한 지표는 여론조사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지난 8월25일 실시한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6개월 이후 국정수행 평가에서 71%의 응답자가 ‘노사문제 잘못했다’고 답해 여러 부문 가운데 최악의 평가를 받았다(‘정치안정-잘못해왔다’ 68%, ‘경제정책-잘못해왔다’ 63%).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노사관계를 잘못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72%에 이르렀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전공과목’인 노동정책에 대해 이처럼 혹평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노무현 대통령 취임 뒤 지금까지 진행된 노-노 관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친노’ 기조는 참여정부 출범 전 이미 힘을 발휘한 바 있다. 올해 1월 초 두산중공업 파업사태가 62일 만에 노조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
그 뒤 정부는 지난 4, 5월에 잇따라 발생한 철도노조와 화물연대의 노사분규에서도 노조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했다. 바로 이때가 노-노 밀월관계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흥은행 노조와 전교조의 연가투쟁을 기점으로 정부 일각에서도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노 대통령도 재계와 보수세력으로부터 ‘친 노동자적’이라며 거친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기류 때문인지 노 대통령도 그동안 고수해오던 친 노동자적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정부를 길들이려는 파업을 하는 노조에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6월23일 지방노동관서 근로감독관 특강), “노조 특혜는 해소돼야 한다”(6월27일 <포브스> 편집장과의 대담) 등의 ‘강경’ 발언을 잇달아 쏟아냈다.
노동계는 대통령의 ‘경고’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지난 6월28일 철도노조의 2차 파업으로 투쟁의지를 이어갔다. 이에 정부는 즉각 농성장에 경찰력을 투입해 해산시키고 참가자 전원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철도노조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과 노 대통령의 관계는 이때부터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화물연대의 2차 운송거부가 벌어지자 청와대는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노동계와 노 대통령의 정면 충돌 양상은 바로 이 두 파업사태의 폭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번 충돌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부터 들어보자. 청와대측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화물연대의 2차 운송거부 사태가 노 대통령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했고 그 결과 대통령이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노동계에 대해 ‘강경발언’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권재철 청와대 노동TF팀장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대통령의 그런 발언은 노동계에 대한 섭섭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지난 4월 철도노조 파업 때 여기저기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그들 요구조건을 다 들어줬다.
이어 5월의 화물연대와 관련한 물류대란이 터졌을 때도 ‘그 사람들 참 딱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요구사항을 거의 다 들어줬다. 그런데 화물연대가 또 다시 2차 운송거부사태를 벌이자 국가지도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연히 화가 나는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동계의 입장을 들어주며 좋은 메시지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재파업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이런 섭섭한 감정을 가진 배경에는 노동계 전반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라기보다 민주노총의 강성 지도부에 대한 ‘감정’이 더 많이 작용하고 보고 있다. 강경 투쟁 일변도의 소수 노동계 지도부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이 더 크다는 것. 노 대통령은 지난 8월26일 이런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노동자 대표들이 전국 노동자들에 대한 집단적 대표성과 지도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고, 맨 앞장을 서는 노동운동 지도부가 일반 노동자보다 훨씬 강경하고 과격하다. 이들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타협 없는 투쟁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타협하려는 순간 그 지도부가 구조적으로 무너지도록 해놨다.”
청와대의 권재철 노동TF팀장도 대통령의 이런 인식에 공감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께서는 기본적으로 ‘시대도 많이 바뀌었는데 전투적 노조의 운동방식은 지양되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고성범 노동부 장관 정책보좌관은 이에 대해 “최근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노동계 전반에 관해서라기보다는 노동운동 상층부와 관련된 것이다. ‘전투적 노동조합, 또는 그것을 이끌고 있는 지도부가 현재 노동계 현실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너무 강성으로만 가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이러한 노동관계 인식에 대해 민주노총과 정치권의 반응은 매우 격앙되고 부정적이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대통령이 최근 며칠 사이 상당히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노 대통령은 최근 ‘민노총이 계속 이렇게 못할 것이다. 안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이런 얘기는 마치 ‘북한이 체제붕괴할 것이다’ 이런 얘기와 똑같은 것이다. 민노총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앞으로 민노총을 길들이겠다는 식의 발언 아닌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손 실장은 “대통령의 노동계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이고 단순논리로 접근하고 있다”며 “일부 강경 지도부만 아니면 우리나라 노조도 ‘순하게’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민주노총은 ‘노 대통령이 지도부 와해를 바라고 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아직 그렇게까지 명시적으로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도 며칠 사이 많이 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발언이나 의도를 상당히 불순하게 보는 것이다. 만약 대통령의 뜻이 일부 강성 지도부의 와해를 겨냥한 것이라면 우리의 대 정부 투쟁 기본노선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지만 정권퇴진 운동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시각에 대해 여당인 민주당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주당 박인상 의원(국회 환경노동위원)은 “노 대통령의 노조 인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조합 조직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지도부를 누가 구성하나. 조합원이 구성하는데,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사람인데 그것을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그들의 권익신장을 위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지도부가 과격하다고 비난을 하면 어떻게 하나. 대통령의 잘못된 현실인식이며 그런 말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이러한 노-노 갈등에 대해 영남권의 K교수는 “노 대통령은 노동자 일반에 대한 이해와 그 처지를 옹호하려는 의지를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대기업 중심의 강경 노조 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 사건도 노 대통령의 ‘진심’과 일부 전투적 노조 지도부를 겨냥한 전술적 발언을 구분 지어서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과연 노 대통령의 최근 강성 발언은 노동계를 향한 전술적 복선이 깔린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때 공명현상까지 일으켰던 노 대통령과 노동운동 지도부의 ‘코드’가 점차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참여정부의 트레이드마크인 ‘대화와 타협’을 위한 노 대통령의 묘수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